[잊지못할 교회 개척기] 임지 없이 사표 내고 잠적 후회 않지만 아픈 기억 조각

Է:2010-04-0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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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못할 교회 개척기] 임지 없이 사표 내고 잠적 후회 않지만 아픈 기억 조각

장차남 목사(부산 온천제일교회)

목사가 된 다음해 연고가 없는 부산에 내려와 부산중앙교회 부목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담임인 노진현 목사님은 교계에 명성이 있던 분으로 나를 잘 대해주셨다. 그러다가 1972년 늦가을쯤, 목사님은 지병을 이유로 당회에 후임자로 나를 공식 요청하셨다. 그때 내 나이 32세였다. 하지만 당회의 한 장로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논란이 됐다. 어쨌든 이 일은 노 목사님의 건강이 호전되면서 없던 일이 됐다.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 재임 6년이 지나면서 나는 불투명한 장래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이미 동기생들은 다 담임목사로 자리 잡아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나 역시 후계 문제에 연연하기보다 백지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한번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급해 ‘임지를 구한 후 사표를 쓰는 관행’을 버리고 사표부터 썼다. 그해는 채워야겠기에 연말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당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사표를 반려했다. 나는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것이므로 물러설 수 없다고 했다.

다음 주일인 새해 1월 1일 밤이었다. 연례적 행사인 고등부 찬양대의 신년축하 음악예배 설교자로 강단에 섰다. 마지막 축도 전 나는 성도들 앞에 나서서 ‘오늘 저녁 이후 부산중앙교회 부목사직을 떠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을 해버렸다. 아내와는 상의 한마디 없었기에 아내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러나 위로하고 다독거릴 겨를도 없이 곧장 가방을 챙겨 이튿날 이른 새벽, 청도 동산기도원으로 잠적해 버렸다. 교회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줄 알고 열흘쯤 지나 사표를 수리했다. 그리고 다섯 주 만에 해운대교회에서 임시목사 청빙교섭이 오고 그 교회에 부임하니 2월 18일이었다. 만일 석 달을 기다려 오라는 데가 없으면 서울 가서 개척할 심산이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는 이때의 일로 그 후 아내에게 많은 원망과 타박을 받았다. 미취학 어린 자녀들과 교회 내 사택에 살면서 예배에 참석하고 교인들과 마주치는 게 얼마나 곤혹스러운지 헤아려 봤느냐며 아내는 두고두고 나를 코너로 몰아붙였다. 백번 옳은 말이므로 할 말이 없고 다만 미안할 따름이었다. 나는 이 일을 후회하지 않으나 지금도 그것이 젊은 날의 객기인지, 용기 있는 결단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가족들 때문에라도 두 번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젊을 때의 파격이 때때로 활로를 열며 도약하게 한다. 시행착오를 통해 경험을 쌓고 성숙하게 하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덕을 세우고 법을 지키며 참고 참는 게 목회에 더 유익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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