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공간 너머] 초록동색과 당동벌이

Է:2010-04-0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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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공간 너머] 초록동색과 당동벌이

1946년 7월, 해방되고 처음 치른 세브란스의과대학 입시 문제 중에는 ‘가리키다’와 ‘가르치다’를 넣어 별도의 단문(短文)을 지으라는 것이 있었다. 요즈음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생도 아는 문제지만, 당시에는 명문 의대 응시자들에게조차 어려운 문제였다. 1938년부터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이 사실상 폐지돼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학생들이 응시한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두 단어의 구별을 어렵게 만든 데에는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한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교육 현장에서는 ‘교수하다’는 뜻의 ‘가르치다’와 ‘지시하다’는 뜻의 ‘가리키다’를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었다. 학생들은 교사가 칠판에 써 놓은 내용을 공책에 옮겨 적은 뒤 교사가 지휘봉으로 ‘가리키는’ 내용에 주목하면서 교사가 하는 말을 경청하면 됐다. 질문은 일반적으로 ‘교사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됐다.

애초에 ‘조선인’ 교육의 목표가 ‘충성스럽고 선량한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요구한 일차적인 덕목은 ‘순종’이었다. 교실에서는 ‘공부 못하는 것’과 ‘말 안 듣는 것(지시에 따르지 않는 것)’ 모두가 처벌 대상이었다. 이런 조건에서는 학생이든 교사든 ‘지시와 교수’ ‘복종과 학습’ 사이의 차이를 정확히 인식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두 단어가 발음까지 비슷하니 혼동할 만도 했다.

‘잃다’와 ‘잊다’도 비슷한 경우다. 하나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이 사라진 것을, 또 하나는 머릿속에 들어 있던 것이 사라진 것을 뜻하니 말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뜻도 발음도 전혀 다른 두 단어가 일상적으로 혼동되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한 단어가 자기와는 별 관계도 없는 다른 단어를 집어삼키고 있는 형편이다. 어디를 가나 ‘품질이 틀려요’ ‘맛이 틀려요’ ‘재료가 틀려요’ ‘콘텐츠가 틀려요’ 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TV 앞에 한 시간만 앉아 있어도 이런 ‘틀린’ 용례들을 무수히 접하게 된다. 연예인들끼리 방담하는 프로그램에서 특히 심한데 출연자들은 ‘사람이 틀려졌어요’ ‘인생이 틀려져요’ ‘생각하는 게 틀려’ 하는 말들을 마구 쏟아낸다. 도대체 틀린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이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며, 틀린 인생을 살아서 무슨 영화(榮華)를 본다는 건가?

‘다르다’는 ‘같다’의 반대말이며 ‘틀리다’는 ‘맞다’의 반대말이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다르다는 것,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표현하면 틀린다는 것은 학교에서도 미디어에서도 수없이 계몽하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이런 오류가 전혀 시정되지 않는 것은 굳이 두 단어를 구별해서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집단적 잠재의식 때문이 아닐까?

자기와 생각이나 기호가 비슷한 사람을 더 좋아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과 친해지기 어려운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초록동색(草綠同色)’이라 한다. 그러나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자기편에는 무조건 동조하고, 다른 편은 덮어놓고 배척하는 것을 ‘당동벌이(黨同伐異)’라 한다. 조선시대에 ‘당동벌이’는 죄였다. ‘당동벌이의 율(律)’이라는 것이 있어 편당(偏黨)을 이뤄 조정의 시비 분별을 흐리게 한 자는 엄한 처벌을 받았다. 당동벌이는 붕당(朋黨)의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한 조선 중기 이후 자주 문제가 됐는데, 일례로 숙종 3년(1677)의 상소문 한 구절을 보자.

“당동벌이는 갈수록 심해져 중앙 고관(高官)에서 지방 수령에 이르기까지 서로 의지하여 잘못을 덮어주며, 탐욕스럽고 더러운 짓이 풍습이 되어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으며 자기 세력을 믿고 남을 침해하므로, 침을 뱉으며 욕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도 조정안에는 규탄할 사람이 없습니다.”

붕당이 대를 이어가며 ‘가문’들과 결합한 탓에 ‘같고 다름’만 따지는 풍조가 생겼고, 이로 인해 ‘옳고 그름’ ‘맞고 틀림’을 구별할 길이 막혔던 것이다.

누구나 자기 생각과 판단이 맞기를 바라지만, 희망과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나도 맞고 너도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다름’을 용인하는 체제다. ‘다른 것’들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다한 뒤에야 마지막으로 ‘다수결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다르다’를 ‘틀리다’로 쓸 뿐 아니라, ‘싫다’와 ‘나쁘다’를 구별하지 않으려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그런 사회 앞에 놓인 미래는 불안하다. 히틀러도 스탈린도,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범죄자 취급하는 풍조가 낳은 ‘사람’이었다. 어차피 혼동해서 쓸 바에는 차라리 ‘틀리다’를 ‘다르다’로 쓰면 어떨까? 혹시 아는가? 세상이 달라질지.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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