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후지코시의 두 얼굴… “한국은 언제까지 몇 십년 전 일을 들춰낼 건가”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2부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

① 근로정신대 징용의 주범 후지코시

일본 도야마시 후지코시마치(不二越町) 주민은 태평양전쟁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밤마다 몸을 떨게 했던 공습,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웃 청년들….



패전국 국민으로서의 기억이다. 조선에서 건너왔던 10대 근로정신대 소녀 1000여명의 이야기는 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후지코시 도야마 공장에서 걸어서 10분쯤 떨어진 곳에 도야마 현립 중앙병원이 있다. 지난 1월 27일 이곳에서 일본 시민 여러 명을 만났다. 가나가와 도요지(78)씨는 자신도 학생 시절 전쟁물자 생산 근로에 동원됐다고 털어놨다. “프로펠러를 만드는 공장이었지요. 조선인 소녀들이 와서 일한 걸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요즘에서야 뉴스를 보고 알았죠.”

가락국수 가게에서 만난 86세 할머니(오쿠라씨)는 뭔가 기억나는 눈치였다. “조선인 숙소를 관리했던 분한테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오쿠라씨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후지코시마치 주민들은 대부분 후지코시 공장에 다녔거나 현재 다니고 있는 지인을 두고 있다. 잡화가게 여주인 이토오(69)씨는 시아버지가 전쟁 당시 후지코시에서 일했다고 한다. ‘나추라 미용실’의 여성 미용사 다카바타케씨의 동료는 최근 미용실을 관두고 후지코시에 취직했다.

한국에서 보는 후지코시는 염치를 모르는 무책임한 전범기업이지만 이곳 주민의 시선은 달랐다.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지역 대표 기업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후지코시는 정년퇴직한 뒤에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해줍니다. 내 주변에도 60대 중반 두 사람이 일주일에 3일 정도 일합니다. 후지코시는 24시간 가동되는 공장이거든요.”(가나가와씨)

“우리 마을에서 운동회를 하면 후지코시 광고를 프로그램 책자에 싣고 돈을 받습니다. 후지코시가 운동회 자금을 대주는 거지요.”(이토오씨)

하지만 후지코시가 전쟁 당시 이곳 군수공장에서 일했던 근로정신대 출신 한국인 할머니들을 대하는 태도는 정반대다. 할머니들은 후지코시 간부와 면담하려고 2001년부터 지금까지 여러 차례 후지코시 본사를 찾았지만 그때마다 문전박대를 당했다. 경비원들과 몸싸움을 하기 일쑤였다. 지난 12일에는 소송 당사자인 김정주(79) 할머니 등이 후지코시 도쿄 사무소까지 찾아갔지만 건물 1층 안내 데스크로부터 ‘(책임자를) 만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해 들었다.

기자가 후지코시 도야마 공장 북문을 찾은 날도 경비원이 다가왔다.

“사진은 무슨 목적으로 찍는 것입니까. 뭐하는 사람입니까. 빨리 이곳을 떠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시끄러운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경비원 다카다 마사미씨는 잔뜩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기자를 훑어봤다. 이 경비원의 태도에서 전범기업의 과거사 인식을 보는 듯했다.

도야마 현립 중앙병원 뒤로 2500m가 넘는 다테야마 산봉우리 여럿이 병풍처럼 서 있었다. 전쟁 때 끌려간 할머니들은 높은 산봉우리는 다 후지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병원 앞에 있던 60대 안팎의 일본인 남성에게 “근로정신대를 아냐”고 묻자 그가 따지듯 내뱉었다.

“한국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전쟁) 책임 문제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몇 십년 전의 일을 들춰낼 것입니까. 한국 사람들, 정말 대∼단합니다.”

차갑고 건조한 말투였다. 과거사에 관해 일본 보통 시민은 바로 이와 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고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가 말했다. 두 얼굴의 후지코시와 반성하지 못하는 일본 시민들에게 과거는 망각의 대상일 뿐이었다.

도야마=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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