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혹한의 홋카이도, 강변에선 매일 아침 조선인 매질이…”

Է:2010-03-16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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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00년] “혹한의 홋카이도, 강변에선 매일 아침 조선인 매질이…”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1부 일본 3대 재벌의 전쟁범죄

④ 채탄·제련으로 전쟁지원한 스미토모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는 한민족에게 혹한과 원한의 땅이다. 1938년 일제의 국가총동원법 제정 이후 1945년 광복 때까지 14만∼15만명의 조선인이 홋카이도로 끌려갔다. 전체 노무자 강제동원 인원 가운데 5분의 1 규모다. 대부분 지옥 같은 탄광과 광산, 토목공사 현장에 배치됐다. 강제노역이 얼마나 참혹했던지 탄광에서 캐낸 석탄에는 조선인 노무자의 뼛조각이 섞여 나왔고,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철도 공사장에선 침목 수만큼 동원 인부들이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던 곳이다.

지난달 2일 홋카이도 중부 아카비라(赤平)시 스미토모 옛 석탄광업소 입구. 눈은 지층을 이뤄 도로 양옆에 1∼2m씩 쌓여 있었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기온으로 길은 이미 빙판이었다. 삿포로에서 아카비라까지 2시간여를 스키 활강하듯 미끄러지며 차로 달려왔다. 하나 둘 눈발이 날리는가 싶으면 금방 앞서 달리던 차의 형체가 사라진다. 또 눈보라다. 그래도 이날은 고속도로가 통제되진 않았다.

폐쇄된 광업소 입구에서 인근 다키카와시 신도쓰가와 농업고등학교 역사 교사인 이시무라 히로시(62)씨를 만났다. 30년 가까이 홋카이도 지역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연구해 온 향토사학자다. 그가 눈으로 새하얗게 덮인 광업소 뒤편 민둥산을 가리켰다.

“‘즈리야마(찌꺼기산)’라고 합니다. 석탄과 함께 섞여 있던 돌들을 선별해 버린 곳입니다. 그게 산이 됐습니다. 엄청난 양의 탄을 캔 것이죠.” 지금은 777개의 계단을 밟아야 올라설 수 있는 해발 197m의 관광지다.

현재 일본 3대 재벌로 꼽히는 스미토모의 아카비라 광업소는 1938년 문을 열어 전쟁 특수를 누린 뒤 1994년까지 존속했다. 계열사 스미토모석탄광업의 중심 탄광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많은 조선인이 노역했던 시기는 1944년 5월로, 1344명이 중노동을 하고 있었다.

스미토모라는 회사 이름이 적힌 붉은색 대형 간판은 내려졌지만 높이 43.8m의 철제 수직갱도 탑이 웅장한 규모로 남아 있다. 지금도 이곳은 스미토모 소유다. 인공 다이아몬드를 가공하는 계열사가 핑크색 건물에 입주해 있다. 한쪽 구석에 세워진 혼비(魂碑)가 보인다. 조선인 노무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문구라도 새겨져 있는 걸까? “강제동원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스미토모 자신을 칭찬하는 내용뿐입니다.” 이시무라씨는 비석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카비라 탄전 지대를 굽이쳐 흐르는 소라치(空知)강으로 이동했다. 이시무라씨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강둑 주변에서는 거의 매일 아침 매질이 있었다는 마을 노인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주로 조선인을 감금하며 고용하던 가와구치구미(川口組) 등 청부 기업들의 소행이었습니다. 조선인 노무자들은 맨몸으로 매질을 당하다 견디기 어려우면 탄이 섞여 새까매진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익사해 떠내려가도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도망을 시도했거나 불만을 말했다는 게 구타 이유였습니다.”

홋카이도 현지 취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스미토모 아카비라 탄광 출신 징용자를 수소문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 한국으로 귀환하는 아카비라 광업소 귀선자 명부에는 총 1023명이 등재돼 있다. 그런데 65년이 흐른 2010년 3월 국무총리 산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도움으로 찾은 생존자는 11명뿐이었다. 강제징용의 한을 씻지 못한 채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다.

영동 지방에 닷새째 대설특보가 이어진 지난 10일,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에서 최찬국(83)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열다섯 살이던 1943년 12월 형을 대신해 홋카이도로 끌려갔다. 대부분의 징용자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린 나이였다.

“형님이 몸이 아팠는데 징용 영장이 네댓 번 나오니까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내가 대신 갔댔죠. 삼형제인데 난 둘째고요. 셋째는 6·25 때 전사했어요.”

당시 강릉군청으로 끌려간 최 할아버지는 양양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 청량리역을 거쳐 부산으로, 그리고 연락선을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로, 이어 혼슈 최북단 아오모리를 거쳐 홋카이도로 들어갔다. 최종 목적지도, 회사 이름도 몰랐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개처럼 끌려갔다”고 했다.

그가 기억하는 아카비라 탄광 지하 300m 깊이의 막장은 조선인들만 노역에 종사한 공간이었다. “위험한 일은 전부 조선사람 시켰어요. 갱 안에서는 전부 우리말만 했고요. 공사장에서 쓰는 투망을 어깨에 짊어지고 오르락내리락했어요. 처음엔 나도 탄을 캐다가 낙석을 맞아 입술이 찢어졌죠. 세월이 오래돼 이제 흉터도 없어졌어요.”

징용 시절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배고픔이었다. “쌀도 훅 불면 날아가는 안남미고요. 대두박(콩깻묵:콩기름 짜고 남은 찌꺼기) 넣고 밥을 지어서 줬어요. 깻묵 안에 어떨 때는 곰팡이가 피었어요. 그걸 덜어내면 쌀이 한 줌도 안 돼요. 새벽에 그걸 먹고, 밥과 단무지 싸준 점심 도시락 가지고 막장으로 내려가 먹고 교대할 때까지 일했드래요. 고향에서 가져온 미숫가루를 아껴 두 숟갈씩 물에 타 마시면서 버텼지요.”

최 할아버지는 그래도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나이가 어려 막장에서의 채탄 작업은 처음 몇 개월만 했고 이후엔 탄차 운전을 해 괄시를 덜 받았다고 기억했다. 광복 후 고향에 돌아오게 됐으니 홋카이도를 넘어 사할린까지 끌려간 징용자에 비해서도 운이 좋았다고 했다.

그의 세대에게 강제동원은 특별할 게 없는 보통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60여년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가난하고 힘없는 다수의 역사이기도 하다.

아카비라(홋카이도)·강릉=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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