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뎀나무] ‘죄수 딜레마’ 벗어나려면
공범인 A와 B가 잡혔다. 심증만 있는 경찰은 이들의 자백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48시간 이내에 자백을 받지 않으면 이 둘은 풀려나게 된다. 경찰은 이들을 분리 심문하며 이렇게 제안한다. “한 사람이 자백하고 한 사람이 침묵하면 자백한 사람은 무죄 석방, 침묵한 사람은 10년 형이다. 둘 다 자백하면 둘 다 5년 형이다. 둘 다 침묵하면 무죄석방이다.” 이 때 경우의 수는 네 가지이다. 둘 다 자백할 경우, A가 자백하고 B는 침묵할 경우, B가 자백하고 A는 침묵할 경우, 둘 다 침묵할 경우이다.
둘 다 침묵해서 무죄 석방이 가능할 것 같지만 실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두 사람의 이익이 상충되는 상황에 있어서 인간의 합리적인 선택이 오히려 최악이 된다. 두 사람 다 침묵하면 무죄 석방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은 최악의 결과인 10년형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한다. 이것이 ‘죄수 딜레마’ 이론이다. 1950년 미 공군의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의 두 과학자 메릴 프러드와 멜빈 드레서가 소개한 이론이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다.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가슴을 파고드는 구절이 있다.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 53:7)
둘 다 침묵하면 무죄판결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이 진술하고 내가 침묵함으로써 10년형을 언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입을 열게 된다. 이익이 상충되는 상황에서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인간사에 예수가 오셨다. 그분의 선택은 최선이며 완전함이었다. 죄수들은 침묵이 자신과 공범자에게 최선의 유익을 준다는 것을 알았지만 ‘죄수 딜레마’에 빠져 입을 열었다. 예수는 공범 죄인이 아니셨다. 하지만 최선의 결과를 위해 침묵하셨다. 예수의 묵비권은 죽음을 선택한 묵비권이다. 그들은 죄가 있었기에 말할 수밖에 없었고 예수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말하지 않으셨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그분을 그리스도 예수로 믿고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르는 보배로운 일꾼들이 많이 있다.
모 종교에서 축구 선수들의 기도 세리머니를 문제 삼고 나왔다. 금번 월드컵에서 자제해 달란다. 요즘 들어 부쩍 민감한 것 같다. 가톨릭 운동선수들도 그들만의 성호를 그린다. 각자의 종교적 소신을 가지고 그리는 그림들에 서로가 침묵할 수 있는 성숙함을 보여 줬으면 좋겠다. 아니 예쁘게 볼 수 있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선수가 골을 넣은 후 성호를 그리든, 합장을 하든, 기도를 하든 먼저 박수를 보낼 줄 아는 성숙한 국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그리고 싶어 하는 그림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가 왈가왈부 하는 것은 ‘죄수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또 그들의 말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죄수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사순절만큼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어떻게 하든지 침묵을 지키자. 그분께서 가신 발자취를 따르자. 예수는 오늘도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성우 목사 (서대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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