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자동차 95.2%의 컬러 심리학… 엑센트서 쏘울까지 ‘색깔 수난사’
현대자동차 YF쏘나타가 출시된 지난해 9월 17일. 대대적으로 시작된 TV광고 속 쏘나타는 짙은 빨강이었다. 색명(色名) ‘레밍턴레드’. 슬릭실버 등 9개 컬러 가운데 회사가 빨강을 ‘민다’는 뜻이다.
파격적 디자인에 걸맞게 ‘섹시함’을 강조한 이 주력컬러는 몇 대나 팔렸을까? 지난달까지 판매된 8만7400대 중 1%가 채 안 된다. 은색계열(54.2%), 검정계열(21.2), 흰색계열(19.8)이 95.2%다.
지난해 팔린 현대·기아차 차종별 무채색 비율(%)은 이렇다. 아반떼 94.7, 투싼ix 95.8, 싼타페 98.9, 제네시스 100(유채색이 없다), 에쿠스 98.9(이상 현대차), 모닝 71.4, 쏘울 31.3, 쏘렌토R 96.2, 로체 99.8.
미국 페인트업체 듀폰은 해마다 지역(국가)별 자동차 인기색상을 설문조사한다. 지난해 12월 조사에서 한국 소비자들은 은색(39%) 검정(29) 흰색(14) 회색(5) 빨강(4) 파랑(3) 순으로 꼽았다. 무채색 선호도 87%. 유럽(75.2) 북미(64.5) 인도(60.4) 러시아(51.0) 등 9개 조사 지역 중 가장 높았다.
지난해 3월 출간된 포토에세이 ‘이스탄불에서 온 장미도둑’. 터키 사진작가 아리프 아쉬츠가 7개월간 머물며 구석구석 촬영한 ‘서울감상문’이다. 10년째 흑백사진만 고집하다 서울 아줌마들 꽃무늬 의상에 반해 컬러필름을 꺼냈다는 그는 이렇게 썼다.
“잿빛 이스탄불에 비해 서울의 색깔은 현란하다. 그런데 거리의 자동차는 대개 검은색 흰색 아니면 회색이다… 자동차회사 주인은 왜 디자이너들이 이런 차를 만들게 놔두는 걸까.”
“컬러시대가 올 줄 알았는데…”
김훈철 서울예대 광고창작과 겸임교수는 2002년 ‘컬러마케팅’이란 책을 썼다. 이제 감성의 시대다, 색깔이 소비를 좌우한다, 무채색으론 감성을 자극하기 어렵다, 기업은 컬러마케팅에 나서야 한다는 요지. 그는 책의 한 장(章)을 자동차 컬러마케팅에 할애했다.
현대차 컬러팀은 최근 2003∼2009년 판매 차량의 색상별 비율을 분석했다. 2003년 75%이던 검정·흰색·은색·회색계열이 2007년부터 3년 연속 90%를 넘었다. 무채색 선호도가 오히려 강화됐다. 지난 9일 김 교수에게 물었다.
-우리나라 자동차는 왜 여전히 무채색일까요?
“그게 참 이상해요. 컬러시대가 오리라 예상했는데… 옷도 돈 낼 때는 결국 무채색을 골라 들거든요. 잠재의식인지, 안정희구 심리인지, 아직 컬러마케팅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있어요.”
-김 교수께선 어떤 차 타시나요?
“회색 오피러스예요. 그러고 보니 나도 무채색이네요. 검정 타다가 다른 색 타보자고 고른 건데.”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을 지낸 권영걸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는 자동차색이야말로 도시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사람은 형상보다 색을 먼저 인식합니다. 건물 가로등 광장 등 도시의 색은 모두 고정돼 있는데 자동차색만 움직여요. 도시 이미지를 좌우하는 요소죠.”
이런 자동차가 우리나라는 왜 죄다 무채색일까? 무채색 차를 사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이유는 “중고차로 팔 때 손해 보지 않으려고”다. 중고차 시장에선 무채색과 유채색 가격 차가 수십만원까지 벌어진다. 그러나 이는 그만큼 무채색 수요가 많다는 증거일 뿐 이 질문의 답이 될 수는 없다.
드물지만 중고차 값에서 유채색이 앞선 사례가 있다. 경차 마티즈(대우자동차) 출시 초기 인기를 끈 빨강은 중고차도 흰색 은색보다 10만원쯤 비싸게 거래됐다.
엑센트의 악몽
무채색 벽을 넘어서려는 자동차업계의 첫 도전은 1994년 출시된 현대차 엑센트였다. 89년부터 현대차 색깔을 개발해온 조성우 컬러팀장은 당시 말단사원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분위기는 이랬다.
“(소비자를) 리드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최초로 파스텔톤의 보라 초록 분홍을 적용했죠. 보라는 미국인 선호도 2위까지 했던 색인데… 1년 만에 색깔을 다 바꿨어요. 공장 탱크의 페인트를 모두 버린 겁니다. 엄청난 손해여서 컬러팀이 고생 좀 했죠.”
파스텔톤 엑센트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긴 했다. 매장을 찾은 고객도 대체로 “보기 좋다”는 반응이었지만 정작 사간 것은 흰색 은색 아니면 검정이다.
컬러팀은 전략을 바꿨다. ‘트렌드를 주도하려 들지 말자. 차라리 다양한 무채색을 제공하자.’ 흰색이 순백색과 진주색으로 나뉘고, 은색에 하이퍼메탈릭 맨해튼실버 등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차종마다 4∼9개인 색상 라인업에서 유채색은 점점 자리를 잃었다. 아반떼 6가지 색상 중 유채색은 청남색과 앰버레드, YF쏘나타 9가지 중에는 에스프레소(짙은 커피색) 레밍턴레드 블루블랙뿐이다. 소비자의 유채색 선택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
튀지 말자!
감성색채공학을 연구하는 석현정 KAIST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는 최근 핀란드 기업 노키아 의뢰로 한국 소비자 트렌드를 조사했다. 조사항목 중 하나는 ‘왜 한국인은 흰색을 좋아하나’.
“노키아가 가장 어려워한 문제였어요. 저는 독일에서 유학했는데 그곳 사람들은 흰색차가 다니면 ‘왜 도색을 안했을까’라고 생각할 정도니까요.”
석 교수는 무채색 선호 이유를 이렇게 추정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튀는 걸 꺼린다, 차 선택은 ‘남들이 어떻게 볼까’가 중요한 잣대다, 외제차 대형차 선호도 결국 남 의식한 것 아니냐, 그렇다면 흰색을 비롯한 무채색은 가장 무난한 선택이다(석 교수도 흰색 아반떼를 몬다. 차 색깔이 튀어 주목을 끌면 ‘안전’에 도움 될 게 없다는 생각에 택했다고 한다).
컬러 양극화 현상도 지적했다. 오랫동안 당연히 흰색이던 가정집 벽지. 몇 년 전 다양한 색상의 ‘포인트 벽지’가 선풍적 인기를 끌더니 요즘은 새 아파트마다 화려함을 경쟁한다. 자신만의 공간과 남이 보는 자동차에 선택하는 색이 다르다는 것이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무채색도 검정과 흰색·은색·회색의 심리가 다르다고 분석했다.
“정반대예요.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는 신분의 상징입니다. 아직 생활용품이 아니에요. 높은 지위를 상징하는 검정은 과시하려는 욕구에서 택하는 반면, 흰색·은색·회색은 자신을 감추려는 선택입니다. 유채색은 개성인데, 아직 개성을 드러내는 분위기가 아닌 겁니다.”
튀지 말자는 심리가 왜 이렇게 강한 걸까.
빨리빨리와 자동차색
한국인의 대표적 특성이라는 ‘빨리빨리’도 자동차색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상관관계는 정일희 기아차 컬러팀장이 지적했다.
“우리나라 자동차 판매방식은 미국 유럽과 좀 다릅니다. 소비자가 선호할 사양을 예상해 집중적으로 만들어놓죠. 구매계약이 체결되면 빨리 인도할 수 있게. 특이한 컬러나 사양은 만들었다가 안 팔리면 재고가 되니까 주문에 맞춰 만드는 편이고요.”
자동차 영업사원이 고객에게 계약 전 반드시 듣는 질문은 “차 언제 나와요”다. 오래 기다려야 하면 계약을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안전한’ 무채색을 많이 만들어둔다는 것이다.
무채색 재고가 많기 때문에, 신속한 출고를 원하는 고객에 부응하려 영업사원이 무채색을 권하는 경우도 잦다. 특이한 컬러를 택하면 종종 “중고차로 팔 때 손해 보실 텐데요” “쉽게 질릴 텐데요” 등의 ‘조언’을 듣게 되는 이유다.
엑센트에 이어 두 번째 ‘색깔혁명’을 시도한 기아차 쏘울. 9가지 색상 라인업에 바닐라셰이크 토마토레드 칵테일오렌지 문나이트블루 블루스톤 등 유채색을 5가지나 포함시켰다. 지난해 판매 1위는 크림색 계열의 바닐라셰이크(52%). 토마토레드가 3위(9%)였고 무채색 비율은 31.3%에 그쳤다.
정 팀장은 “구상단계부터 신세대를 겨냥하고, 광고도 컬러에 초점을 맞추고, 빨리빨리 판매방식에서 탈피한 게 쏘울”이라고 말했다.
서울에 어울리는 자동차색은?
미국 뉴욕의 노란 택시와 영국 런던의 빨간 이층버스. 도로에 과감히 집어넣은 원색은 두 도시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다. 두 색깔을 서울 도로에 가져온다면? 권영걸 교수는 “어울릴 수 없다”고 단언했다.
“고층빌딩 가득한 뉴욕은 서울보다 훨씬 어두워요. 런던은 고색창연한 건물이 안개에 덮여 있죠. 노랑과 빨강은 두 도시에 활기를 줍니다. 서울은 뉴욕 런던과 색이 달라요. 서울의 고유한 색과 조화되는 색을 찾아 자동차에 입혀야죠. 그게 아니면 차라리 무채색이 나을지도 몰라요.”
쏘울의 성공을 가져온 바닐라셰이크는 유채색이지만 색의 강도는 최대한 낮췄다. 엑센트의 파격에 비하면 무채색 트렌드와 ‘타협’한 셈이다. 우리나라 자동차는 제3의 색깔혁명을 시도할까. 그렇다면 다음 색깔은 무엇일까.
“사회 분위기인데, 역사적 이유도 있을 거예요. 유교 전통, 일제 식민지, 군사정권, 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며 자리 잡은 거겠죠.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모태범 선수가 막춤 추자 다들 깜짝 놀랐잖아요. 남 의식하지 않는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었던 거죠.”
황 교수 차도 회색이다. “아내가 골랐는데 ‘눈에 띄어 좋을 것 없다’는 이유였죠. 제 꿈은 폭스바겐 노란색 뉴비틀 타는 거예요. 실현될지 모르겠지만.”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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