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규환 (1) 54년전 동창생이 예견했던 고아 돌봄의 길
얼마 전 오래된 서류들을 정리하다가 54년 전에 고등학교 동창이 써 준 편지를 찾았다. 훗날 목사가 된, 나보다 세 살 아래인 이재형군이 졸업식 때 준 것이었다. 누렇게 바래고 군데군데 얼룩이 진 편지지만큼이나 ‘이런 게 있었나’ 할 정도로 내 기억 역시 가물가물했다.
‘군(君)은 대한(大韓)에 부모 없는 고아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할 수 있겠지. 그들은 아버지를 부르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네. 나는 믿네. 군은 그들의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어 줄 것을.’
깜짝 놀랐다. 내가 평생 고아들과 함께 지내게 될 줄, 그때 그 친구는 어찌 예견했을까. 나의 평소 생각과 삶의 모습을 보며 어떤 예감이 들었던 것일까.
나는 1933년 황해도 옹진군 은동리라는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나라의 기운이 참혹하게 기울고, 우리 집안 가세도 기울 대로 기운 때였다. 할아버지는 해주에서 버스업체를 운영한 큰 부자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버스업체와 전답을 모두 팔아 금광사업을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큰 돈을 빌려 사업에 투자했다. 그러나 결국 부도가 났고, 우리 집은 파산했다. 아버지는 곧 몸져 누우셨다.
어머니가 병든 아버지와 어린 나, 남동생, 여동생 등 여섯 식구의 생활을 떠안게 됐다. 나와 스물일곱 살 터울이 지는 큰형님은 학교 선생을 하며 잘 살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 집안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시장에 나가 생선과 잡화를 떼다 광주리에 담아서 집집을 돌면서 팔았다. 60근(3.6㎏)에 달하는 물건을 머리에 이고 하루 80리나 돌아다니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 “잘 있었지? 별 일은 없었고?” 하며 다정한 말을 건네시는 걸 잊지 않으셨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살림에 보태기 위해 매일같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한 짐씩 해 와야 했다. 지금도 내 팔과 다리에 남아 있는 흉터는 그 당시 서툰 낫질로 생긴 것이다. 그때는 특별한 장래의 꿈이랄 게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밥 먹고 살아가는 것이 눈앞의 문제였다.
어머니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내가 아홉 살이던 무렵이다. 여느 때처럼 광주리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가 갑자기 집안에 있던 신주단지를 모조리 마당에 끌어내 패대기치고 불까지 질러버렸다. 거동을 못하던 아버지는 “저 미친 년! 저 미친 년!” 하고 그저 고함만 질러댔다. 어머니는 전혀 주눅들지 않고 “이딴 것 이제 다 필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외치셨다. 이후 나는 주일마다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감화를 주고, 우리 가정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신 분은 오택관 목사님이라고, 어머니는 종종 말씀하셨다. 2003년에야 알게 됐지만, 오 목사님은 지금 내가 친형님처럼 가깝게 모시는 우리나라 초대 공보처장관 오재경 박사의 아버님이셨다.
아버지는 1945년 해방을 앞두고 돌아가셨다. 나는 얼마 뒤 은동국민학교를 어렵사리 졸업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는 진학하지 못했다.
정리=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
◇조규환 원장 약력=황해도 옹진 출생. 동양공고, 강남대 사회사업과 졸업. 미 사회복지협의회 회원, 한국사회사업시설연합회 회장, 대한사회복지회장,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장 등 역임. 현 한국사회복지협의회 부회장,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실행이사, 한국아동단체협의회 상임부회장, 한국기독교사회복지협의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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