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래창 (17) 서러운 ‘반동가족’ 피란길… 외삼촌 의지 서울 생활 시작

Է:2010-01-1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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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박래창 (17) 서러운 ‘반동가족’ 피란길… 외삼촌 의지 서울 생활 시작

1951년 1월 지리산 일대에서 국군과 전투경찰의 빨치산 토벌작전이 시작되고서야 우리 마을 사람들은 피란을 떠났다. ‘반동 가족’으로 격리돼 오래 소외돼 있던 우리 가족은 자세한 사정도 모르는 채 귀중품만 챙겨 집을 나섰다.

한 고개 지나서 어느 폐가에 들어서 보니 마을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들은 가마솥과 식량을 잔뜩 지고 와 있었다. 우리도 쌀은 조금 가져왔지만 솥이 없으면 밥을 지을 수 없었다. 물론 새어머니와 열다섯 살 형, 열 두 살이었던 나, 젖먹이 이복동생이 전부인 우리가 그런 짐을 지고 올 수 없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을 폐가 한 귀퉁이에서 먹고 잤다. 배고픔이 한계에 달하고 동생의 울음소리가 귀를 찢는데도 우리는 사람들에게 밥을 얻으러 가지 못했다. 다들 안면이 있는 사이인데도 먼저 나서는 이가 없었다. 무서운 세상이라고, 그때 처음 생각했다.

그런 중 형이 벌떡 일어섰다. “제가 가서 먹을 것을 구해 올게요. 집에 가면 뭐라도 있을 거예요.” 사람들이 말렸지만 형은 막무가내였다. “걱정 마세요. 금방 올게요.”

형은 그렇게 뛰쳐나갔다. 그대로 영영 못 볼 것 같아 몸이 떨려왔지만 차마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고 영원처럼 긴 밤이 흐르고, 간밤의 포탄 소리에 도망가지도 않았는지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할 때 형은 돌아왔다. 등에 짊어진 통을 내려놓는데 뜨거운 밥이 가득 들어 있었다.

눈물이 왈칵 나왔다. 집까지 무사히 간 것도 그렇지만 밥을 해 왔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나도 그렇듯이 형은 한번도 밥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어두운 부엌에서 어떻게 밥을 지었는지 신기했다. 다행히 날이 추워서 그 밥으로 3∼4일 연명하면서 첫 고비를 넘겼다.

그 뒤로도 순창 등지에서 몇 달간 지냈던 피란 시절은 어떻게 지나왔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고생이 심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했다.

형이 먼저 서울로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냥 있으면 남아 있는 빨치산에 끌려가 노역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울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외가 쪽 친척들이 살고 있을 터였지만 연락처를 몰랐다. 형은 “서울에서 구세군을 찾아가면 아버지 친구가 있을지 몰라”라고 하면서 무작정 서울로 떠났다. 그리고 얼마 후 연락이 왔다. 외삼촌을 찾았고 그 댁에 신세를 지기로 했으니 함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자는 것이다. 그렇게 내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외삼촌은 서울 신길동에 살고 계셨다. 공무원으로 그나마 안정된 살림이었기 때문에 우리 형제를 잠시나마 맡아주셨다. 이때 외삼촌을 만난 것도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다. 외삼촌께서 우리에게 “너희 부모님은 훌륭한 사역자이셨다”고 강조하시며 주일 예배에 참석하도록 강권하셨기 때문이다. 전도사였던 외숙모님도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축복은 부모님 대에서 끊겼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외삼촌께 언제까지 신세질 수는 없어 형님은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나는 신문팔이 잡지팔이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때로는 형님과 둘이, 때로는 나 혼자 살며 매일 다음 끼니 걱정을 했다. 그러던 중 중학교 때 귀중한 경험을 했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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