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주은] 붕어빵 트럭의 진실

Է:2010-01-14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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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이주은] 붕어빵 트럭의 진실

우리 동네 붕어빵 트럭에서는 붕어빵이 한 개에 삼백 원, 세 개에 천 원 받는다. 지나가다가 마침 줄선 사람들이 별로 없기에 천 원어치 사면서 슬쩍 물어보았다. “저기요, 따지는 건 아니고요. 그냥 가격이 이해할 수 없어서요. 한 개에 삼백 원이면, 천 원엔 네 개 주시는 게….” 붕어빵 아저씨는 웃으시며, “원래 천 원에 세 개 파는데요. 한 개씩 사먹는 초등학생들 때문에 하나에 삼백 원만 받아요.”

언젠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호두과자를 딱 두 개 정도만 디저트로 먹었으면 해도, ‘낱개로는 안 팔아요’라고 거절할 것이 분명해서, 그냥 봉투 하나 가득 샀던 기억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내 경우는 호두과자를 포기하느냐 아니면 봉투째로 사느냐이지, 낱개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예 열어두지조차 않았던 것 같다.

낱개로 사먹는 아이에 대한 붕어빵 아저씨의 특별대우는 할인뿐만이 아니다. 봉투를 받아들고 돌아가려던 참에 나는 더 인상적인 장면을 보게 되었다. 어떤 아이가 아저씨에게 미리 “전 팥 빼고요” 하고 주문하니, 팥소 빠진 풀빵 껍데기만의 붕어빵이 어느새 한 칸에 구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어릴 적 나 역시 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어른들 몰래 팥소를 덜어 버리고 겉껍질만 먹은 적은 많았지만, 애초부터 그 팥을 빼내고 빵을 만들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이미 주어진 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였었나 보다.

붕어빵이란 본래 판에 부어 틀에 찍혀 나온, 모양도 크기도 한결같아서 누가 봐도 획일성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빵 아니던가. 그런 붕어빵 트럭 속에서 단체가 아닌 개인이 존중되고 있다니, 게다가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맞춤형 주문까지 이루어지고 있다니, 모순이라기보다는 내겐 그저 감동일 뿐이다.

한 직장동료는 점심에 칼국수를 먹었는데, 저녁에도 칼국수를 먹었다며 투덜거렸다. 이유를 들어보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저녁에 네 명이 식당에 가서 두 명이 칼국수를 시켰는데, 세 번째 사람이 “그럼, 뭐 나도 칼국수”라고 말하더란다. 그래서 네 번째 사람이었던 그 친구는 낮에 칼국수를 먹은 사실도 잊은 채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주방을 향해 외쳤단다. “여기 모두 칼국수로 주세요.”라고. 손님이 많다거나 해서 눈치 상 칼국수만 시키는 것이 현명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붕어빵집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 친구도 뭔가 느끼는 바가 있는 듯 이렇게 말했다. “왜 그랬던 걸까요? 그냥 자연스럽게 내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면 되는데….” 혹시 우리에게 개인의 요구는 입 밖에 내지 말고 참아야 한다는 집단문화의 흔적이 은연중에 살아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남과 다른 생각은 자제해야만 할 것 같은 보이지 않는 억압에서 벗어나서 맘껏 표현하면서 살면 좋겠다. “배가 부른데, 호두과자 두 개도 파시나요?” “전 칼국수 말고 우거지탕 먹을게요!”

이주은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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