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래창 (11) 불량 원사로 ‘월남치마’ 원단 개발… 사업 대성공
1976년쯤이었다. 당시 최대 방적회사였던 방림방적에서 불러 갔더니 빈터에 광목 원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묘한 무늬가 찍혀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천에 나염을 할 때 염료가 번지지 않도록 밑에 받치는 속지로 사용된 천이었다. 본래 나염 기계는 이런 속지가 필요 없는데 설비가 국내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기술 부족으로 한동안 속지를 썼던 것이다.
광목은 다섯 번 정도 사용된 후라 이 무늬, 저 무늬가 어지럽게 겹쳐 찍혀 도저히 상품이 될 수 없는 상태였다. 진한 색으로 염색을 해도 무늬를 다 가릴 수가 없고, 버리려면 오히려 큰 돈이 들었다.
방림방적에서는 이 원단을 우리가 처리해 주기를 원했다.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일단 당차게 말은 하고 돌아왔는데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원단 사업을 시작한 이래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을 살펴보는 버릇이 있었다. 독특한 색깔이나 직조의 옷을 보면 집까지 따라가 안감 조금을 샘플로 얻어오곤 했다.
그때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을 무심히 바라보는데 별안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불규칙하고 어지러운 무늬 때문에 상품이 안 된다면 규칙적인 무늬를 위에 찍으면 어떨까?”
당장 공장으로 가서 원단을 가성소다(양잿물)에 한 차례 빨아 무늬를 어느 정도 흐릿하게 한 뒤 그 위에 동그라미나 별, 꽃 등 일정하게 반복되는 무늬를 찍었다. 이는 염료가 원단 위에 얹히듯 찍히는 것이기 때문에 배경 무늬보다 확연하게 선명했다.
그러자 두 가지 무늬가 대비되면서 세상에 다시 없을 독특한 원단이 만들어졌다. 그때는 광목으로 만든 블라우스나 바지 등이 단순한 디자인의 캐주얼 의류로 만들어져 저렴하게 잘 팔리곤 했다. 이 원단은 이런 의류용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그 일이 계기가 됐다. ‘저 회사에 맡기면 뭐든 잘된다’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비슷한 시기에 이런 일도 있었다. 여성 양장용 원단을 짤 원사를 찾고 있었는데 당시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폴리에스테르 원사(실)는 거의 수출용이고 국내에서 사용할 원사 얻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그런데 누군가 부산의 한 공장에 가면 원사가 많다고 했다.
가 보니 과연 원사가 쌓여 있었다. 그런데 전부 불량품이었다. 굵기가 일정치 않았던 것이다. 실은 굵기가 일정치 않으면 천을 짠 뒤 염색했을 때 얼룩덜룩해진다.
그냥 돌아가려다가 생각해 보니 ‘염색이 안 된다면 나염을 하면 어떨까’ 싶었다. 내가 본래 생산하려고 했던 여성 양장용 원단은 안 되겠지만 다른 용도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염가로 구입한 그 실로 폴리에스테르 니트(저지) 원단을 만들어 꽃무늬 등을 나염해 시장에 내놨다. 그랬더니 또 내놓자마자 다 팔렸다. 바로 ‘월남치마’라고 불렸던, 주부들이 편하게 입는 통치마를 만드는 데 사용됐다. 이 원단으로 만든 치마는 기존의 것보다 신축성이 좋고 무늬가 선명해 집집마다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사업은 첫 10년 동안 신나게 진행됐다. 그때쯤 나는 교회를 옮겨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상가에 문을 연 지 얼마 안 됐던 소망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그때 소망교회는 첫 건축을 시작하려 할 때였다. 사업이 순조로웠던 나는 1년 안에 500만원을 내겠노라고 호기롭게 작정을 했다. 그 직후 사업의 첫 고비가 찾아왔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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