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박,장애인과 함께했던 ‘아름다운 청년’… 대소변 받아내며 기도로 봉사해
북한 인권 개선을 촉구하며 지난달 25일 성탄절에 두만강을 건너 북한에 들어간 미국 국적의 대북인권운동가 로버트 박(박동훈·28)씨의 입북 전 행적이 하나둘씩 확인되고 있다.
3일 사단법인 ‘함께걷는길벗회’(이사장 박종열 목사)에 따르면 로버트 박은 2008년 8월 인천에 있는 길벗회 산하 섬김의 집에서 선교사 자격으로 한 달간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이곳에서 중증장애인 16명과 지내면서 함께 기도하고 그들의 대소변을 받아냈다. 섬김의 집 오현철 원장은 “당시 박 선교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간절한지 하루 한 끼 식사 외에는 모든 시간을 장애인들을 위해 할애했다”고 회상했다.
박 선교사는 외부 북한선교모임 등에 참가한 날에는 밤 11시쯤 들어오기도 했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 북한 동포들을 위해 묵상기도하는 일을 빼놓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박 선교사의 장애인 봉사활동은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 공동대표이기도 한 박종열 목사의 주선에 의한 것으로 로버트 박은 박 목사의 외5촌 조카다. 박 목사는 1980년대 대표적 민주 인사로 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박형규 목사의 아들이다.
박종열 목사를 비롯한 로버트 박의 한국 내 친인척들은 본보가 이 같은 사실을 취재하자 3일 편지를 보내왔다. ‘로버트가 성탄절에 두만강을 건너갔다는 소식을 접하며’라는 제목의 편지에서 친척들은 그의 입북이 북한 동포들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됐다면서 ‘돌출적’으로 보이는 그의 입북 뒤에 숨어 있는 진심이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로버트 박에 대해 친척들은 “평화롭고 총명한 아이였다. 중학교 때 애리조나 투산으로 이사 간 이후 어려운 친구를 돕는 활동에 열정을 쏟았고 장애인과 멕시칸 불법 이주민을 돕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길 가다 옷을 벗어주거나 돈을 털어주기도 하는 소년이었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남한 주민들이 왜 북한 동포에 대해 관심이 없는지 궁금해했다”면서 “단번에 세상 문제를 다 풀려하지 말라고 일렀으나 그는 복잡한 정치 문제를 아랑곳하지 않고 어려운 이웃집 아이 돌보러 가듯 두만강을 건너버렸다”고 썼다. 그의 친척들은 또 “북한 정치범 수용소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난감하고 당혹스럽다”고 밝혔다.
인천=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
다음은 편지 전문이다.
주님의 종, 박동훈이를 위해 기도하며
박동훈이는 2008년 여름 ‘함께걷는길벗회’의 섬김의 집(장애인 복지시설)에서 1개월 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인들과 함께 하며 늘 기도와 사랑으로 보살피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안위와 사랑의 마음이 북한에도 전달되기를 기원합니다.
박동훈이를 좀 더 이해하며 기도하는 마음이 되기를 바라며 새해에는 남북이 좀 더 화해와 협력,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한해가 되기를 바라며 모든 분들도 이런 분위기에서 더욱 신나고 기쁜 한 해를 시작하기를 기원합니다. 새벽울림 박종렬 드림
로버트(박동훈)가 성탄절에 두만강을 건너 북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하며
우리는 지금 충격과 깊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착하고 여린 마음의 그가 홀로 이 추운 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넜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로버트는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경쟁을 싫어하는 평화롭고 총명한 아이였습니다.
그는 늘 밝은 미소를 띠고 있는 부드러운 아이였지요.
중학교 때 애리조나 투산으로 이사 간 이후
그는 학교 공부보다는 어려운 친구를 돕는 활동에 열을 쏟았으며
장애인, 멕시칸 불법 이주민들을 돕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식구만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힘들어하며
길 가다가 옷을 벗어주거나 돈을 털어주기도 하는 소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국에 와서 탈북청소년들과 지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로버트에게 북한 관련한 일은 정치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특히 한국의 역사나 상황도 잘 모르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니
그런 일은 각별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 왔고
사랑이 많은 그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노인들과 지내기도 하고
탈북 가족과도 연결하면서 어느새 한국말을 익히고
북한주민의 삶을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늘 가난한 자 아픈 자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굶주리는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그는 하루 한 끼의 식사만 하였습니다.
가족을 보러 와서도 밥은 안 먹고 기도만 하자는 그에게
가족이란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금식을 하려면 오지 말라”는 심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잦은 단식으로 야위어가는 가는 그를 보면서
우리는 밥 먹이는 데만 급급하였습니다.
얼마 전 그는 카페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700만 명이 북한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고
25만 명 정도가 학대와 고문으로 정치범 수용소에서 죽어가는데도
국제사회는 침묵하고 있다.”
그는 왜 남한 주민들이 북한 동포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우리는 남한 땅에서의 삶도 충분히 불안하고 고단하다고 답했습니다.
세계 방방곡곡에 빈곤과 불행이 가득하니 단번에
세상 문제를 다 풀려고 하지 말라고도 일렀고
정치적으로 복잡해질 수 있는 북한 선교를 하지 말고
당분간은 미국에서 인권운동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곳의 이웃과 함께 있겠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항상 별 볼일 없는 일로 쫓기면서 사는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평화의 기운을 전해주고는 다시 자신의 가난한 친구들에게로 갔습니다.
성탄절 가까워 질 즈음
자기가 좋아한 책들을 부모에게 보냈다는 이메일을 보내왔을 때,
자기는 아주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이메일을 친척에게 보내왔을 때,
또 신학자 본 훼퍼의 일생을 그린 동영상을 보내왔을 때,
사실 우리는 내심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성탄절에 두만강을 건너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복잡한 정치외교적 문제나 종교를 둘러싼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어려운 이웃집 아이를 돌보러 가듯
그는 두만강을 건너버렸습니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북에서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 지 난감하고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우리의 조부모님은
늘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런 조부모님을 존경한 손자가 로버트였습니다.
로버트의 ‘무모한 행동’이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버트의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간 로버트 동훈을 사랑하였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분들께
감사와 존경의 정을 전합니다.
2010년 새해 한국에 사는 로버트의 친척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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