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김 부장’이 딱 제 얘기 같았습니다. 애는 아직 대학생인데, 회사를 나오면 정말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니까요.”
A씨(61)는 시중은행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하고 지난해 정년퇴직했다. 1964년생인 A씨의 국민연금 수급 연령은 63세. 국민연금이 나오기 전까지 퇴직금으로 버텨야 하는 그는 퇴직과 동시에 재취업 준비에 들어갔다. 취업을 준비 중인 첫째와 대학생인 둘째를 생각하면 ‘은퇴’는 시기상조였다.
경력을 살리기 위해 관련 자격증을 4개나 취득했다. 이력서도 셀 수 없이 썼다. 6개월 넘는 도전 끝에 A씨는 금융 상담 업무로 재취업에 성공했다. 1년 단위 계약직이지만 그래도 A씨는 연신 “나는 운이 좋았다”고 했다. 그는 “재고용이든 재취업이든 현직 때의 벌이와는 비교가 안 되지만 주위를 봐도 퇴직했다고 해서 일 안 하고 그냥 쉬겠다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저출산·고령화가 심화하며 정년연장 논의가 다시 불붙고 있다. 법정정년은 만 60세이고 국민연금 수급 연령은 현재 63세에서 2028년 64세, 2033년 65세로 오른다. 퇴직 후 연금을 받기 전까지 3~5년의 ‘소득 공백기’는 중장년층의 삶을 짓누르는 게 현실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법정정년을 연금 수급 연령에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지난해 말 정년퇴직한 B씨(61)는 인생 2막을 위해 전기기사 자격증 취득을 준비 중이다. B씨는 국민연금 제도가 도입된 직후부터 꾸준히 보험료를 납입해 200만원 정도 연금을 받을 예정이지만 “연금만으로는 생활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아파트 관리비, 각종 보험료와 세금 등 고정비만 따져봐도 먹고살기 빠듯하다는 설명이다.
결혼하지 않은 자녀들과 연로하신 부모를 생각하면 마음이 더욱 조급하다. 그는 “회사 다닐 때 아무리 인정을 받았어도 60세가 넘으면 경비일 구하기도 쉽지 않다. 사무직 출신은 재취업이 더 어렵다”며 “연금 수급 공백이 5년까지 늘어날 텐데 (생계에) 타격이 너무 크다”고 한숨을 쉬었다.
지난 8월 국가데이터처 발표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55~79세 고령층 가운데 경제활동인구(취업자·실업자 포함)는 1001만명으로 집계됐다. 고령층 전체 인구(1644만7000명)의 60.9%에 달한다. 2005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1000만명을 넘은 건 올해가 처음이다.
고령층의 고용률(59.5%)과 1년 내 취업 경험(67.3%) 역시 모두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고령층 10명 중 7명(69.4%)은 앞으로도 계속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평균 근로 희망 연령은 73.4세로, 1년 전 조사보다 0.1세 높아졌다.
한국의 중고령층이 더 오래 일하기 원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평균수명은 길어지는데 주된 일자리(생애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내려놓은 뒤 맞이하는 노후는 오롯이 개인 몫이기 때문이다.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 일하고 싶다’(54.4%)는 답변이 ‘일하는 즐거움 때문’(36.1%)이라는 응답을 월등히 앞서는 것은 한국의 노후 보장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문제는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한 뒤 재취업이 쉽지 않고 대부분 주된 일자리보다 더 열악한 일자리로 이동한다는 점이다. 구직기간이 길어질수록 임금은 더 낮아지고 경력과 맞지 않는 일자리에서 근무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사실도 여러 연구를 통해 확인됐다.
결국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하기 전 인생 2막을 위한 대비가 필요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고령자고용촉진법에 따라 근로자 수 1000명 이상 기업은 정년 등 비자발적 사유로 퇴직하는 50세 이상 근로자에게 재취업지원 서비스를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기업 종사자는 2023년 기준 전체 근로자의 9% 수준에 그친다.
대기업을 정년퇴직한 C씨는 “사내 교육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하루하루 업무 처리하기도 바쁜데 근무시간에 재취업 교육을 받으러 가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가라앉는 한국의 성장잠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중장년, 고령자들을 노동시장에 유입시키는 정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2차 베이비부머(1964~74년 출생)는 지난해부터 정년 퇴임 시기에 접어들어 2034년까지 노동시장을 순차적으로 이탈할 예정이다.
2차 베이비부머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근로 의지가 강하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소득·자산 여건도 상대적으로 양호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7월 이슈 보고서에서 60대 고용률이 2023년 수준으로 유지되고 정부의 별도 정책 지원이 없을 경우 2차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연간 경제성장률을 0.38% 포인트 하락시킬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면서 “2차 베이비부머의 은퇴 후 계속근로와 고용의 질적 제고를 동시에 이루기 위한 법·제도 마련에 사회적 합의가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