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계엄 1년, 정치는 아직 국민을 따라오지 못했다

입력 2025-12-03 00:50

시민은 일상을 되찾았지만 정치는 아직 제자리걸음
제도 개혁은 더디게 움직였고 사과조차 성찰이 부족했다
권력은 사라져도 제도는 남아 정치가 책임의 자리 지켜야

12월 3일은 대한민국이 비상계엄이라는 초유의 정치적 격랑을 겪은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암흑에 빠질 뻔한 민주주의를 되살린 것은 시민들이었다. 그날 밤 국회로 달려간 사람들, 추운 겨울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선 이들 덕분이었다. 계엄은 2시간반 만에 일단락됐지만,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1년이 지난 지금, 국민은 일상에서 제자리를 찾았다. 낙엽을 밟으며 초겨울 공기를 느끼고,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며 따뜻함을 채운다. 붐비는 지하철 출근길과 분주한 사무실, 저녁 도시 풍경도 다시 평소의 속도로 흘러간다. 시민의 회복력은 조용하지만 강하게 한국 사회를 다시 움직이는 동력이 됐다.

그러나 정치는 시민의 회복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1년은 충분히 성찰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계엄 사태는 단순히 한 대통령의 오판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 전체의 내구성을 시험한 사건이었다. 경제 분야의 ‘스트레스테스트’처럼 극한 상황에서 시스템이 어디까지 버티는지 확인된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무엇을 고치고 어떤 제도를 보완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본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정치권의 성찰 부족이다.

정치는 다시 진영 싸움에 갇혔다. 책임보다 정쟁을, 국민 전체보다 지지층만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계엄 해제 요건을 손질하는 법 개정 등 최소한의 제도 보완은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계엄 선포권 제한이나 위헌적 조치에 대한 사법 통제 강화 등 근본적 재발 방지 장치는 여전히 제자리다. 이러한 정치적 경직성은 ‘사과’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국민의힘은 사과의 본질보다 정치적 계산에 매달리고 있다. 사과를 타이밍과 유불리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있다. 사과는 하는 쪽의 전략이 아니라, 받는 국민이 인정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 단순한 원칙조차 외면하고 있다. 더욱이 계엄을 일으킨 전직 대통령은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떠넘기고 있다.

계엄 사태는 공직 사회에도 근본적인 질문을 남겼다. “공무원은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일부 공무원·군·검찰·행정조직은 상급자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려 했지만, 위법한 명령을 거부하며 직을 걸었던 이들도 있었다. 이 대비는 국가가 한 개인의 명령으로 움직이지 않고, 수많은 공무원의 법적 판단·양심·헌정 질서에 대한 충성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최근 국가공무원법에서 ‘복종의 의무’ 조항이 삭제된 것은 바로 이 교훈을 제도화한 결과다. 공무원의 충성 대상이 대통령이나 상관이 아니라 ‘국민 전체와 헌법’임이 명문화됐다. 이는 공직사회를 권력자 중심에서 헌법 중심으로 돌려놓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볼 수 있다. 76년 이어온 상명하복 문화를 뒤늦게나마 바로잡은 조치다.

권력은 유한하다. 정권은 바뀌고 사람은 떠난다. 그러나 제도는 남는다. 헌법은 남고, 공무원 조직은 남고, 시민의 일상은 남는다. 한 나라의 품격은 누가 권력을 잡았는가로 결정되지 않는다. 위기 속에서 제도가 얼마나 제대로 작동했느냐로 결정된다. 계엄 사태의 1년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정치는 지금이라도 제도 개혁과 헌정 질서 보완이라는 본령으로 돌아와야 한다. 책임을 회피하고 사과를 미루며 정쟁을 부추기는 정치로는 다음 위기를 막을 수 없다.

정치는 여전히 그날의 그림자 속을 헤매고 있지만, 국민의 하루는 계속된다. 정치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시민의 삶은 또 다른 무게와 맞서고 있다. 일자리는 부족하고 집값과 물가는 오르지만, 국민은 오늘도 일상을 이어간다. 가까운 사람들과 밥을 먹고, 사소한 이야기에 웃으며 삶을 지킨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다시는 국회 위로 헬기가 떠오르지 않는 나라, 공무원이 상관이 아니라 국민에게 복종하는 나라, 책임 앞에서 정치가 도망치지 않는 나라, 그리고 내일의 통장 잔고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나라. 이런 것들이 지켜질 때 비로소 보통의 하루가 제대로 작동한다.

1년 동안 민주주의의 방향을 바로잡은 것은 시민이었다. 이제는 정치가 그 뒤를 따라올 차례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