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사과문의 정석

입력 2025-12-03 00:32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러니 이를 어떻게 반성하고 극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궤적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잘못을 빠르게 사과한다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되겠지만 변명부터 늘어놓거나 남 탓으로 돌린다면 문제로 인한 논란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뿐이다.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나올 법한 당연한 상식인데 현실에선 제대로 된 사과를 마주칠 일은 드물다.

인터넷에선 ‘사과문의 정석’으로 통하는 두 개의 사례가 있다. 숱한 사건과 논란 끝에 나온 여러 사과문 중에서 우리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명문이라며 네티즌들이 꼽은 것들이니 새겨볼 만하다.

첫 번째는 2015년 6월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이 발표한 사과문이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감염 사태의 진원지로 삼성서울병원이 지목되자 이 부회장은 “국민께 큰 고통과 걱정을 끼쳐드렸다. 머리 숙여 사죄한다”면서 “저의 아버님께서도 1년 넘게 병원에 누워 계신다. 환자와 가족분들께서 겪으신 불안과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다. 최고 책임자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이어 병원을 혁신하고 피해자에게 보상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군더더기 없는 단문과 명확한 책임 인정, 변명 없는 태도 덕분에 당시 온라인에선 ‘삼성에 근무하는 인문학 박사들이 총동원된 문장’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두 번째는 2016년 방송인 전현무가 연말 시상식을 진행하면서 강호동에게 무례한 언행을 했다는 비판을 받자 내놓은 사과문이다. 전현무는 “많은 분들이 불쾌감을 느끼셨음을 알게 됐다”면서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함부로 선을 넘은 점 인정한다. 호동 형님과 통화했고 경솔했던 제 실수를 말씀드리며 사과했다”고 전했다. 이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경솔한 실수였다”면서 “아직 한참 부족하다. 앞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 드리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글에도 ‘웃음기 싹 뺀 엘리트 사과문의 교본’이라는 호평이 이어졌다.

논란의 결이나 무게는 다르지만 두 사과문에는 공통점이 있다. 책임의 주체를 분명히 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담았으며 재발 방지와 구체적인 피해 복구를 약속했다. 무엇보다 “나만 잘못한 게 아니다”는 식의 변명이 없었다. 사과문 덕분인지 두 사람은 어려움을 잘 이겨냈다.

비상계엄 1년을 맞아 사태를 초래했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국민의힘이 계엄 사과를 놓고 내홍에 휩싸였다. 김용태·김재섭 등 초·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도층의 유입을 위해 당 지도부가 계엄 사태를 사과하고 윤석열 전 대통령과 절연해야 한다는 요구를 내놨지만 장동혁 대표는 이를 거부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말부터 열린 전국순회 집회에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민주당의 의회 폭거와 국정 방해가 계엄을 불러왔다”고 말했다. 계엄은 잘못됐지만 그건 민주당 탓이라는 잘못된 사과문의 전형을 보인 셈이다. 이어 “충성스러운 군인들이 재판정에서 시련을 겪고 있고 사찰을 위협받는 공무원들도 있다”고 강조했다. 계엄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인데 이들을 먼저 보듬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이는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이 지난 1일 비상계엄 당시 국회 출입을 통제한 경찰의 행위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한 것과 대비된다.

좋은 사과문은 남 탓을 지우고 내 잘못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계엄은 다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역사적 잘못이다. 사과문의 정석을 따르는 게 계엄을 옹호하는 극우 세력과 결별하고 국민 다수의 용서와 지지를 얻는 최선의 방법이다.

김상기 콘텐츠랩 플랫폼전략팀 선임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