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병원에서는 환자를 고객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병원 엘리베이터로 노인이 이동식 침대를 밀고 들어왔다. 침대에는 또 다른 노인이 누워 있다. 누워 있는 노인은 어머니고 서 있는 노인은 아들이다. 어머니는 치료비가 얼마나 나왔냐고 물어본다. 아들은 아실 필요 없다며 비싼 치료비를 걱정하는 어머니를 달랜다. 아들 뒤로 보이는 병원 홍보 포스터에 ‘고객’이라는 글자가 또렷했다.
비싼 치료비라는 말에 한참을 생각했다. 치료에 값이 매겨져 있고 비싸기까지 하다면 환자는 치료비와 자신의 아픔을 두고 저울질하지 않을까. 비싼 치료비가 들어가는 자신의 가치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 지불된 비용이 아깝다.
의학의 발전과 의료시장의 성장은 궤를 같이했다. 의학은 인류의 건강 증진이라는 꿈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 ‘인류’에는 모든 인류가 포함되지 않는다. 의학의 혜택은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다. 현대의학 이전의 의료 행위들은 치료 성과는 낮았지만 온정으로 환자를 돌보는 것이었다. 과거의 온정들이 왜 의학의 발전과 함께 사라졌을까. 이것은 현대 의료가 질병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인식하고, 치료를 돌봄이 아니라 문제해결로 여긴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제 치료는 질병을 해결하며 가시적인 그리고 계산 가능한 하나의 서비스 단위가 되었다. 해결에 대한 대가는 정당해 보인다. 하지만 고객은 자기 몸의 가치를 따져보며 비용을 지불한다. 고객은 존엄성을 지불하고 치료를 구입한다.
‘hospital’의 어원은 환대와 돌봄이었지만 병원과 환자는 점점 판매자와 고객의 관계가 된다. 환자가 아니라 고객이어야만 더 잘 치료하겠다는 뜻일까, 아니면 고객으로서 병원을 찾을 때 환대를 받을 수 있는 현실의 방증일까. 어쨌든 고객은 익숙한 호칭이 되었다.
고객이라는 말에 상업적 의미가 묻어 있지만 환자의 자율성과 선택권의 보장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고객은 선택의 주체다. 하지만 이 자유로운 선택권도 시장 논리 앞에서는 무력하다. 경제력이 없다면 시장은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는 돈은 ‘주조된 자유’라고 말했다. 더군다나 환자는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없는 주체다. 아픈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 건강은 구입할 수 있는 재화가 아니다. 특히 만성질환에서 건강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다. 그러니 주조된 자유조차 건강을 살 수는 없다.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고 팔 수 없는 것을 거래하는지도 모른다.
만약 환자가 선택을 한다면 그건 치료 너머에 있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이냐에 대한 선택일 것이다. 이때는 질병의 해결보다 환자에 대한 돌봄이 중요하다. 돌봄은 쉽게 정의할 수 없는 행위다. 하지만 그래서 돌봄이어야 한다. 대부분 치료들은 명확해서 계산 가능하며 지불한 만큼만 제공되기 때문이다. 돌봄이란 일방적인 치료의 제공이 아니라 치료에 대한 상호적 고민이다. 돌봄은 환자의 삶에 집중한다. 치료 자체보다 치료가 환자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 고민한다. 단순히 해결이 아닌 돌봄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돌봄 속에서의 해결’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질병을 없애는 치료는 삶을 돌보는 치료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호칭은 행위에 가장 앞선 부분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부르면서’ 행위한다. 고객으로 부르고 치료를 판매하다 보면 환자가 돌봄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잊게 된다. 돌봄이라는 가시적으로 규정하기 힘들고 가격표도 붙일 수 없는 행위는 판매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의료 현장에서 간과된다. 환자에게 내미는 손이 진료비 계산서를 쥐고 있다면 그 손으로 아픈 손을 잡아주지는 못하리라.
김대현 창원파티마병원 흉부외과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