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조선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은 학교나 병원 설립 과정에서부터 개항기 조선의 사회상까지 근대사의 핵심을 담은 1차 사료다. 당시 조선 사회 변화를 기록한 보고서, 개인 서신, 일지, 회계 문서들이 포함된다. 현존하는 자료의 상당수는 한국교회 초기 역사뿐 아니라 근대 조선의 제도와 문화 변화를 서양인의 시선으로 남긴 귀중한 기록이다.
문제는 이 사료들이 대부분 낡은 종이와 파손된 필름에 남아 있어 시각적 정보가 크게 손상돼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당시 서신의 특징인 필기체마저 겹치며 문자를 온전히 식별하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다. 기본적인 단어조차 잉크 번짐 때문에 형태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수십 년간 ‘존재하되 읽히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던 문서들이 빛을 보게 됐다. 소요한 감리교신학대 역사신학 교수가 옛 자료를 분석할 수 있는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을 개발했다고 1일 밝혔다. 소 교수는 2019년 부임 후 감신대 역사박물관 관장도 맡으면서 박물관 내 120만쪽이 넘는 방대한 자료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는 “전문 연구자가 온종일 매달려도 수십 쪽 해독이 전부”라며 “혼자 정리하면 200년이 걸린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말했다.
‘귀한 믿음의 유산이 여기 있는데, 왜 꺼내 볼 수 없는가’라는 절박함이 그를 움직였다. 소 교수는 6개월 동안 스스로 코드를 익히며 AI 모델 개발에 몰두했고 이는 ‘프로젝트 카이로스(Kairos)’라는 AI 기반 복원 시스템 개발로 이어졌다. 프로젝트 카이로스는 난해한 필기체를 읽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문서를 자동 분류하고 핵심 주제를 추출하며 시대·지역·인물 관계를 연결하는 디지털 아카이브 파이프라인(여러 단계를 한 번에 묶어 돌리는 자동 시스템)이다.
소 교수는 이 시스템을 활용해 광성중·고등학교가 보유한 무어 선교사 기록 2818쪽을 분석했다. 사람이 한다면 몇 년이 걸릴 기록을 AI는 48시간 만에 해독하고 번역까지 끝냈다. 그는 이를 “기록을 다시 호흡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AI는 문서마다 날짜, 발신, 수신, 핵심 주제, 사건 중요도를 자동 태깅해 CSV(Comma-Separated Value) 파일로 저장한다. 인식 정확도가 98%에 이른다는 게 소 교수의 설명이다.
국민일보가 단독 입수한 자료 중에는 대표적으로 존 무어(1874~1963) 선교사의 동창이자 감리교 목회자인 폴 웨이앤드가 1902년 무어를 조선 선교사로 추천하며 보낸 서신이 있다. 이 편지에서 웨이앤드는 “그(존 무어)는 어떠한 임무가 맡겨져도 충성을 다할 것이며 결코 비겁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 실제로 무어 선교사는 조선에 파송된 뒤 추방될 때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소 교수는 내년까지 박물관 자료의 디지털 스캔을 마치고 이후 AI 분석 파이프라인을 최종 완성해 전면 무료 공개할 계획이다. 이밖에 한문 고어, 한국어 고어 흘림체도 실험 중이며 가톨릭 순교 증언집도 수록한다는 각오다. 그는 “140년 동안 침묵했던 목소리가 다시 들리도록 하겠다”며 “근대사 연구의 문이 새로운 방식으로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