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25년 또 한 해를 마무리할 때가 왔네요. 이맘때쯤 찾아오는 추수감사절과 곧이어 맞이할 성탄은 찬양을 빼놓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올 한 해는 국가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려운 한 해였지만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신자가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건 인간인 우리만 하는 일도 아니지요.
성경은 태초부터 세상 끝 날까지 하늘의 천사들도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 찬양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도 계속될 거예요. 영원한 그 나라에서 우리는 어떤 음악으로 찬양을 드릴까요. 찬송가 시편 클래식 CCM 아니면 영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함께 부를 찬양이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음악 속에도 과학이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소리는 물질이 떨리면서 공기를 진동시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걸 파동이라 부르지요. 음악은 특별히 사람의 성대나 악기가 공기를 진동시켜 만든 파동이 우리 귀에 전달되는 현상입니다. 공기는 진동 횟수에 따라 다른 높이의 소리가 나는데 이들을 아름답게 배열한 것이 음악이죠. 서양 음악에서 기준이 되는 음은 공기가 1초에 440번(440 헤르츠(Hz)라 표시) 진동하는 소리인 라음입니다. 서양 음악은 도레미파솔라시의 7음계로 이루어져 있어요. 도의 진동수가 1일 때 한 옥타브 위의 도가 2배의 진동수인 2가 되고, 1과 2 사이에서 다른 음들은 5/4, 4/3과 같이 수학적 비율로 7등분 되어 있어요. 이때 라는 음계에서 1과 2 사이 2/3 지점, 1.6667이 되고요.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가 이렇게 간단한 수학적 비율들로 진동수를 구분하면 아름다운 음악이 된다는 것을 알아냈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은 서양 음계와는 달리 5등분한 5음계를 사용했고요.
도미솔, 파라도, 솔시레와 같은 세 음의 진동수의 비율은 4:5:6의 비례 관계를 가지는데요. 신기하게도 이런 수학적 비례 관계가 있는 음들이 모였을 때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요. 이 수학적 비율이 왜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지는 아직 잘 몰라요. 당연히 하나님의 작품이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겠지요. 사람들은 이 화음을 찾아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고요. 종교개혁 시기의 과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이 수학적 비율이 너무 아름다워 태양계의 행성들 사이에 이 수학적 비율이 없는지 찾아보려 애썼고 그 과정에서 찾은 것이 케플러 제 3법칙이었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음도 변하는 존재입니다. 다장조에서는 아름답던 음들 사이의 간격이 조정되면서 화음이 달라지잖아요. 절대적이라 할 수 없죠. 피타고라스의 수학적 비례에 맞는 자연스러운 음계에서 음의 간격을 똑같이 맞추는 조옮김 등이 음악적 기법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이것을 평균율이라고 불러요. 완전한 화음은 아니죠.
음은 환경에 따라서도 변해요. 온도와 습도에 따라 조금씩이지만 변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한 시도를 통해 지금도 새로운 음악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이 땅에서 음악을 통한 우리의 찬양은 완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음악일지라도 그렇죠. 그런 점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하겠지요. 부족한 우리의 찬양을 기쁘게 받아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요.
공기의 떨림이 소리이기에 공기가 없으면 소리도 없어요.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찬양도 지구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어요. 지구 바깥에는 공기가 없으니까요.
성경 여기저기에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해요. 어떻게 찬양할까요. 바람 소리나 계곡의 물소리도 찬양일까요. 지난여름에 쓴 제 글에서 매미의 노래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는 몇 가지 증거를 말했어요. 매미뿐 아니라 수많은 곤충이 다양한 방식으로 노래해요. 가을밤 귀뚜라미는 귀뚤귀뚤 울지요. 오른쪽 날개에는 삼각뿔 모양의 150개 톱니 같은 홈이 있어 이를 왼쪽 날개에 비벼 바이올린처럼 소리를 냅니다. 이 음이 배의 네 개 얇은 공명막을 울려 수백 미터까지 들릴 만큼 커지지요.
왜 노래하는지는 아직 잘 몰라요. 곤충학자 장 앙리 파브르는 이 소리가 짝짓기 때문은 아니라고 했어요. 수컷의 연주와 관계없이 짝짓기가 이루어지고, 암컷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수컷이 오히려 암컷 집을 찾아가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그는 귀뚜라미의 노래가 안락한 집과 배부른 삶을 기뻐하는 소리라고 결론 내렸어요. 괴로움 속에서 내는 소리와는 전혀 다르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 노래가 먹이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처럼 느껴져요.(마 6, 눅 12)
또 많은 곤충은 우리가 들을 수 없는 초음파로 노래해요. 숲속이 고요해 보여도 실제로는 곤충들의 초음파 음악으로 가득한 곳이지요. 들리지 않는 찬양이 차곡히 쌓여 있는 셈이에요. 곤충이 무엇을 노래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소리 자체에서 하나님 존재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가사가 없어도 그 속의 조화와 아름다움에서 창조주를 발견하지요. 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도 음악에서 신적 존재를 느낀다는 표현을 했지요. 한 해를 감사와 찬양으로 마감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