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 차가운 평화와 차가운 전쟁

입력 2025-11-24 00:33

1938년 9월 30일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독일 뮌헨에서 히틀러를 만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란트 합병을 용인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같은 날 귀국한 그는 다우닝가 10번지 앞에 서서 “독일에서 평화를 가지고 명예롭게 귀환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for our time)라고 믿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주무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닷새 뒤 윈스턴 처칠은 뮌헨협정을 맹비난하며 “영국과 유럽이 첫 번째 대재앙의 순간에 서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협정은 ‘도덕적 건강과 군사적 활력을 최고조로 회복해 옛날처럼 자유를 위해 다시 일어서지 않는 한 해마다 우리에게 제공될 쓰디쓴 잔의 첫 모금, 첫 맛보기’에 불과했다. 처칠이 예견한 대로 체임벌린이 말한 평화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물거품이 됐다. 시대의 오독에 기초한 평화선언은 허망하게 깨졌고, 체임벌린의 이름은 역사 속에 유화정책이라는 잘못된 정책의 대명사와 함께 기록됐다. 반면 처칠은 총리가 돼 대독 전쟁을 이끌었고, 지금까지 세계의 영웅적 리더로 기억된다.

2025년을 한 달 남짓 남긴 지금 우리 시대의 평화는 무엇일까. 송민순 전 참여정부 외교통상부 장관은 최근 출간한 저서 ‘좋은 담장 좋은 이웃’에서 한반도의 ‘차가운 평화’를 제안한다. 미국이 달라졌고, 중화 민족주의 야심이 커졌으며, 일본의 역할이 확대되고, 핵무장한 북한은 적대적 두 국가를 선언한 상황에서 더 이상 ‘따듯한 평화’를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류·협력에 기초해 비핵화와 평화 그리고 통일을 추진하는 것은 어려우니 일단 남북한이 경계를 분명히 하고 두 국가로서 공존하자고 한다. 이를 위해 핵 잠재력 확보를 포함한 한국의 군사적 억제력 강화도 주장한다.

차가운 평화는 일종의 메타포로 그가 만든 말은 아니다. 찰스 쿱찬 미 조지타운대 교수는 차가운 평화를 경쟁과 상호억지력에 근거한 안정이라고 정의하면서 협력과 상호 안심에 기반한 안정이라는 의미의 따뜻한 평화와 대비했다. 마이클 도일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심화하는 미·중 경쟁이 냉전, 즉 차가운 전쟁으로 귀결되지 않으려면 차가운 평화를 위한 타협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차가운 평화는 무력 사용을 금지하고 양측의 기본적 합법성을 보장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인데, 기후위기 공동 대응, 타협에 의한 러시아·우크라이나전 해결, 새로운 미·중 데탕트, 사이버공간 규범 확립 등을 구체적 현안으로 제시했다.

송 전 장관의 제안은 시의성이 있고 무게감도 남다르다. 시대변화에 대한 예민한 인식을 바탕으로 현실적 해법을 모색하는 문제의식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차가운 평화 구현에 필요한 최소한의 협력이 무엇인지 설명을 찾기 어려워 아쉽다. 대신 그는 남북의 더 선명한 분리와 우리의 억제력 강화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이 될 것이라지만 그 길에서 만나게 될 당장의 도착지는 차가운 평화도 아닐 듯해 우려된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에서 적대적이란 수식어는 두 국가론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정상적 국가 관계에서는 사람과 정보의 교류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생존은 엄격한 주민통제와 외부 정보 차단에 의지한다. 따라서 북한의 시각에서 남북한이 두 국가로 지내려면 반드시 적대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과연 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고 좋은 담장과 좋은 이웃을 전제로 하는 차가운 평화의 시도는 오히려 자칫 한반도 냉전 강화로 귀결될 수 있다. 지금 한반도에서 차가운 평화와 차가운 전쟁의 사이는 그만큼 좁다.

마상윤 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