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고백적 글쓰기 넘치나
침묵을 기둥으로 세울 때
당신의 글이 흔들리지 않아
침묵을 기둥으로 세울 때
당신의 글이 흔들리지 않아
지난 몇 년간 문학에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자기 고백적 글쓰기다. 이는 SNS의 짧은 고백에서 시작해 출판 시장을 가득 채운 다양한 형태의 자전적 에세이,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을 뒤덮은 ‘고백적 서사’의 확장을 반영한다.
신과 영웅의 대서사를 말하던 문학은 인간을 존재의 중심으로 둔 르네상스와 인간의 내면을 이해하려 했던 계몽주의, 감정의 고유성을 발견한 낭만주의, 산업화 속 고립의 근대적 경험을 거쳐 점차 ‘작은 서사’로 시선을 옮겨왔다. 독자들은 투병기에서 돌봄의 문제를, 애도의 글에서 상실과 불안을 공유하고, 일상의 기록에서 놓치기 쉬운 삶의 감각을 발견한다. 타인의 사소한 삶이 더 이상 사소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 미세한 이야기 속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작가가 되기 위해 대단한 모험이나 사건을 기다리지 않는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그 글이 누구에게나 닿을 수 있는 글쓰기의 대중화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자유로운 글쓰기가 일으키는 오해도 있다. 특히 자기 고백적 글쓰기를 둘러싼 ‘솔직함’의 압력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숨겨둔 상처를 꺼내는 일이 곧 정직함이며, 그것으로 문학의 필요조건을 충족할 수 있다고 믿게 한다. 그렇지만 모든 고백이 진실을 낳는 것은 아니다. 고백에는 서사의 욕망이 개입되고, 그 욕망은 종종 진실을 변형한다. 때로는 과한 폭로로 변질될 우려도 있다. 또 나를 열어젖히는 일이 자신을 소모시키거나, 자기 안의 이야기를 단번에 고갈시키기는 위험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 모든 것이 ‘소재’가 되는 이 시대에 우리가 품어야 할 질문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말하지 않음이 아직 훼손되지 않은 진실을 지키는 방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혼자만 간직한 기억, 설명되지 않는 감정, 이해할 수 없는 상처들이 있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자기 자신만의 것. 비밀이라 불러도 좋은 이것은 언제나 두 얼굴을 가진다. 하나는 완전히 숨기고 싶은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 모든 것을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다. 깊이 감추려는 힘과 바깥으로 나가려는 힘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는 지점, 바로 그곳에서 이상한 충동이 생겨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간절히 쓰고자 하는 욕망 같은 것.
나에게도 그런 비밀이 있다. 많은 글을 썼고, 삶의 여러 장면을 기록했지만 절대 꺼내지 않는 한 조각이 있다.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 안에 비밀로 남아 있을 때 힘을 갖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는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나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자신에게 묻고, 그 이유를 파헤친다. 내 안에서만 살아 있는 어떤 것이 문장 밖으로 나오면 설명이 되고, 그 과정에서 가장 사적인 진실이 희미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글이 되지 못하는 비밀, 그 침묵의 변두리를 배회하는 시간은 내게 한 편의 글보다 더 소중하다. 모든 것을 언어화할 수 없고, 모든 것을 의미 안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며, 동시에 쓰기를 향한 사라지지 않는 열망을 다시 만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레일라 슬리마니는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은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된다고 했다. 그는 모든 글에는 보이지 않는 뒷면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고, 그래야 우리가 쓴 것이 진실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더 솔직한 글을 요구하며 글쓰기를 스트립쇼로 만들어 가는 이 세계에서, 어디까지 자신을 열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작가들에게 슬리마니의 이 말을 꼭 들려주고 싶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글쓰기의 뒷면이 있다는 것을. 침묵을 기둥으로 세울 때, 당신의 글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쓰지 않음으로 쓰고 있는 그 무언가가 당신을 더 오래, 더 멀리 쓰게 할 것이다.
신유진 작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