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적인 낡은 성경 해석
성폭력 피해자 향한 편견 불러
신이 주신 존엄성 되찾아야
성폭력 피해자 향한 편견 불러
신이 주신 존엄성 되찾아야
윤가은 감독이 신작 ‘세계의 주인’으로 돌아왔다. 평단의 갈채를 받았던 전작 ‘우리집’과 ‘우리들’은 가난과 가족 해체, 따돌림과 소외의 상황에도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어린이들의 용기와 희망을 그려냈다. 신작의 주인공은 전작들에 비해 나이가 좀 더 든 고등학교 여학생 ‘주인’이다. 영화가 아직 상영 중이니 줄거리를 모두 공개할 수는 없으나, 성폭력 피해자 ‘주인’이 ‘피해자다움’이라는 편견에 맞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존엄한 성장통을 담아냈다.
감독이 던지는 묵직한 주제 의식은 엔드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나를 객석에 그대로 매어뒀다. 내가 평생을 사랑하며 참여해 온 교회 공동체가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피해자다움’이라는 편견을 재생산하는 낡은 성경 해석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는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이 ‘더럽혀졌다’거나 ‘능욕당했다’라고 표현된다. 피해자에게 ‘잠잠히’ 침묵하도록 종용하거나, 오히려 피해자를 음해하는 듯한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물론 성폭력 범죄에 대한 처벌도 기록돼 있다. 그러나 처벌의 근거가 피해 여성이 당한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여성이 속한 가문과 민족이 당한 수치로 옮겨져 있다. 심지어 피해자의 시신을 복수 전쟁의 정당한 깃발로 내세우는 민족적 서사가 펼쳐지기도 한다.
교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성경의 이러한 이야기들을 ‘문자 그대로’ 전달하고 교육하는 데에 관심을 쏟아 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종교와 신학, 법과 정치 세계의 유일한 ‘주인’이었던 남성의 눈과 입으로 성경 해석을 주도해 왔다. 여성에게만 정조 관념을 강조하는 낡은 성경 해석에서는 성폭력 피해자의 삶이 회복 불가능한 극단적 파괴 상태로 성급히 단정된 나머지, 그들을 평안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창조적 해석이 나오기 어려웠다. 오히려 아예 언급 자체를 봉인함으로써, 성범죄자에 대한 정당한 처벌의 기회를 빼앗고 피해자를 사건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게 하는 수치심의 굴레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에서 지난달 세상을 떠난 여성주의 구약성서학의 권위자 필리스 L 트리블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성경이 ‘공포의 텍스트’로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지적했다.
그러니 성폭력 피해자의 삶을 일상의 평안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성폭력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정의가 필요하다.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자유에 대한 침해로 규정하는 법적 정의만으로는 성경과 같이 권위 있는 이야기들과 그 이야기들의 가부장적 해석들이 오랫동안 제공해 온 ‘피해자다움’의 편견으로부터 피해자를 온전히 해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에게는 누구나 신의 형상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도 바로 그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관계는 타자에 담긴 신의 형상, 그 본질은 같으나 현상은 다르게 피어난 신의 또 다른 형상을 발견하고 인격적인 친밀성을 쌓아가는 행위다. 강압과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성폭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 친밀성의 거리를 일방적으로 제거하고 그에게 담긴 신의 형상을 침탈하는 ‘시도’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행위가 ‘시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오염’과 ‘능욕’의 관점으로 성폭력을 해석하는 신학에서는 피해자의 일상 회복이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에게 담긴 신의 형상이 그의 무한한 타자성에서 기원했다고 믿을 때, 그것이 인간의 어떠한 폭력으로도 절대 훼손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성폭력 가해자를 엄중히 처벌해야 하는 이유는 피해자의 삶이 파괴돼서가 아니다. 어떤 것도 제대로 파괴하지 못했다. 다만 신의 형상을 침탈하려 했다는 시도만으로도 그는 가장 심각한 불의를 저질렀다. 신의 형상이 피해자에게 여전히 온전하게 살아 있다. 평온한 일상은 바로 그 사실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김혜령
이화여대 부교수
호크마교양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