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만 축낸다고?… ‘쓸모없음’이 세상을 바꿨다

입력 2025-11-14 00:10
1917년 설립된 일본 이화학연구소는 충분한 재정 지원과 자율적인 연구가 가능한 ‘과학자의 낙원’이었다. 사진은 1943년 완성된 동양 최초의 입자가속기. 계단 제공

2009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들어간 저자는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를 거쳐 현재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 근무하고 있다. 과학자는 아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저자는 연구소의 발전 전략을 설계하고 해외 제도를 국내에 도입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과학기술 정책 실무자다. 몇 년 전 대전역에 내려 택시에 올라 기초과학연구원을 가자고 했다. 기사는 위치를 몰라 되물었다. “예전 엑스포과학공원 자리”라는 설명에 그제야 차를 움직였다. “그 좋은 땅에 왜 엉뚱하게 연구소를 지었는지 모르겠어…쓸모도 없는걸.” 가는 내내 쓴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책은 저자의 씁쓸한 경험에서 시작됐다. 저자가 만난 택시 기사처럼 많은 사람은 연구소가 “우리 삶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의아해하고, 더 나가면 “세금만 축내는 곳”으로만 생각한다. 책은 단순하게 말하면 연구소의 역사다. 하지만 연구소 이름과 적당히 역사만 나열한 게 아니다. 세계사와 과학사의 맥락 속에서 연구소의 역할을 조명하고 있다. 다 읽고 나면, 책의 부제 ‘연구소는 어떻게 과학을 발전시키고, 산업을 키우며, 사회를 바꾸었는가’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지금 왜 연구소가 필요한지도 절감할 수 있다.

과학은 오랫동안 개인적인 호기심의 영역이자 취미 활동이었다. 자연과 우주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저 궁금했던 사람들이 서재나 집안 실험실에서 과학 연구를 진행했다. ‘열역학 제1법칙’을 밝혀낸 제임스 줄은 양조업자였고, ‘멘델의 유전법칙’으로 유명한 그레고어 멘델은 가톨릭 사제였다. 그런 과학에 국가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과학은 “그냥 궁금해서”가 아닌 “국익을 위해서” 연구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중심에 연구소가 있었다.

연구소는 ‘과학의 국가화’에서 출발했다. 최초의 근대적 국가 연구소는 1887년 독일의 제국물리기술연구소(PTR)다. 근대 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독일은 정밀 측정과 기술 표준의 부재가 산업 경쟁력의 약점임을 절감했다. 당시 태동하던 전기산업의 경쟁력을 키우고 제국의 영광을 이루려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연구소가 탄생한다. 국가는 과학자들을 고용해 연구를 시키고, 그 대가로 급여와 연구비를 지급하는 체제는 꽤 성공적이었다. 한국 산업화의 기초를 세운 원자력연구소(1959년)나 한국과학기술연구소(1966년·KIST)도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으면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재정적 안정성과 함께 학문적 자율성은 연구소의 강점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양대 축이다. 국가의 강력한 지원으로 과학자들은 당장에는 쓸모없어 보이는 기초 과학 연구에 자유롭게 몰두 할 수 있었다. 자율성의 원칙을 확립한 인물은 신학자이자 과학행정가로 활약한 아돌프 폰 하르나크였다. 독일 제국의 3대 황제로 즉위한 빌헬름 2세는 “학생을 가르칠 의무가 없는 기초과학 연구소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1911년 카이저빌헬름협회를 설립했다. 초대 협회장이었던 하르나크는 과학이 발전하려면 지원과 운영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국가의 지원은 받지만 운영은 간섭받지 않겠다”는 유명한 ‘하르나크 원칙’을 확립했다. 아직까지도 전 세계 대부분의 연구소는 이 원칙으로 운영된다. 1917년 설립된 일본 이화학연구소는 충분한 재정 지원은 물론 자유로운 토론과 창의적 모험을 권장했다. 그 결과 붙은 별명은 ‘과학자의 낙원’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일본은 동양 최초의 입자기속기를 만들어냈고,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자연과학부문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국가가 됐다.


전쟁은 과학자들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과 함께 과학자들은 국가에 동원된다. 인공 질소비료의 개발로 “공기에서 빵을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받는 프리츠 하버는 카이저빌헬름협회의 물리화학·전기화학연구소장으로 임명된 후 독가스도 개발했다. 하버의 연구소는 독일 육군의 하부 조직이었고 하버 자신은 화학전 부대의 참모였다. 나치 정권은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카이저빌헬름협회를 직접 통제한다. 협회는 무기 개발은 물론, 나치 이념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맡는다. 베를린의 뇌연구소는 나치의 안락사 프로그램으로 죽은 700명의 뇌를 연구 자료로 삼았다. 저자는 “정치가 과학을 삼켜버린 두고두고 회자될 오점”이라고 말한다.

애초 연구소가 부국강병의 시대적 요구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쟁과 무기 개발에 과학이 동원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과학은 이 과정에서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수혜자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전쟁은 과학 연구에 큰돈이 몰리고 연구소 조직이 비약적으로 커지는 기반도 됐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 미국 정부가 주도한 ‘맨해튼 계획’은 20억 달러의 예산과 13만명의 인력이 투입된 초대형 연구 프로젝트였다. 맨해튼 계획의 핵심이었던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는 현재 인공지능(AI), 에너지, 우주, 양자컴퓨팅, 나노 기술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책의 출발점인 ‘연구소의 쓸모’로 돌아가 보자. 애초 쓸모를 논하는 비난의 화살은 기초 연구를 향한다. 기초 연구는 당장 쓸 수 있는 성과를 목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이화학연구소는 400조번의 충돌실험과 12년에 걸친 실패를 거쳐 2016년 원자번호 113번의 ‘니호늄’을 발견했다. 일본이라는 이름(니혼)이 들어간 원소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한 나라의 자존심이 됐다. 저자는 “기초 연구는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국민을 화합하게 하는, 느리지만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또 기초 연구가 당장에는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그 ‘쓸모없음’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고 강조한다. “원자의 구조를 이해하려는 보어의 호기심이 현대 반도체 산업을 낳았고, 시공간을 통합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GPS 기술을 일상생활에 쓸 수 있게 했다.”

⊙ 세·줄·평 ★ ★ ★
·20세기 이후 과학의 역사는 곧 연구소의 역사다
·한국의 자연과학 분야의 노벨상은 언제 나올는지
·쓸모없음이 언제 쓸모 있으므로 바뀔지 모른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