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서울 종로구의 ‘한림수직, 기억의 흔적’ 팝업스토어엔 낡은 옷들이 전시돼 있었다. 1989년 한 부부가 제주 신혼여행에서 구입한 아이보리색 스웨터가 눈에 띄었다. 색은 조금 바랬지만 형태는 그대로였다. 딸 박정진(31)씨는 “요즘은 옷을 쉽게 사고 버리지만 이건 세대를 이어 입을 수 있는 보물 같은 옷”이라며 “부모님이 36년전의 추억이 되살아난 선물 같은 시간이라며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평범한 이들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한림수직의 옷과 그에 얽힌 기억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팝업스토어를 기획한 이는 고선영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대표다. 고 대표는 한때 제주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며 명품으로 통했던 니트 브랜드 한림수직을 복원해 다시 키우고 있다. 이날 만난 고 대표는 “한림수직의 복원은 사람들의 기억과 그 시간을 살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림수직의 시작은 1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계를 위해 육지로 떠난 제주 소녀 ‘순임’이 부산 공장에서 일하다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아일랜드 출신 맥그린치 신부가 제주 여성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도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로 결심하면서 한림수직이 만들어졌다. 성이시돌목장에 양을 들이고, 직조 강습소를 세웠다. 그렇게 태어난 한림수직은 미국 타임지에 소개됐었다. 서울 조선호텔과 제주 칼호텔에 매장을 열기도 했다. 니트 한 벌을 갖기 위해 ‘한림수직 계’까지 만들 정도로 인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값싼 합성섬유와 중국산 양모가 보급되며 2005년 문을 닫았다.
브랜드의 이름이 다시 떠오른 건 2020년이었다. 고 대표가 제주 로컬매거진 ‘iiin(인)’ 작업을 하면서다. 제주의 일상을 콘텐츠로 만들던 그는 한 빈티지숍 사장에게서 한림수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기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제주에서 50년 가까이 이어진 니트 브랜드가 있었다는 게 놀라웠어요. 심지어 너무 사랑해서 지금까지 옷을 대물림해 입고 있다는 걸 알고 브랜드 재생을 고민하게 됐죠.”
복원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한림수직에서 일을 해봤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한림수직이 뭔지 알려주겠다”며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한 해를 꼬박 헤맨 끝에 13년간 한림수직 제품의 최종 검수를 맡았던 김명열 장인을 만나 품질 복원을 시작했다. 일부 제품은 여전히 수편으로 제작된다. 성이시돌목장 양모와 동물을 학대하지 않는 ‘뮬징 프리 울’을 사용하며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재주상회는 ‘장인 니팅 스쿨’을 운영해 기술 전승에도 힘쓰고 있다. “한 명이 500만원을 버는 것도 좋지만 열 명이 50만원을 버는 구조도 가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림수직이 제주 여성들의 일자리를 만들었던 것처럼요.”
한림수직 복원 프로젝트는 지난해 누적 매출 10억원을 달성했다. 다음 달엔 일본 도쿄의 복합문화공간 다이칸야마 츠타야서점에서 팝업을 연다. 오스트리아의 한 편집숍과 협업도 추진 중이다. 고 대표는 한림수직의 재생을 “이야기를 손에 잡히는 형태로 보여주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시간의 가치는 복제할 수 없어요.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고 추억을 불러오는 시간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죠.” 제주의 기억을 이어가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지역이 가진 특별한 이야기를 콘텐츠로 풀어내고, 그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이 지역은 계속 갈 수 있다고 믿어요.”
신주은 기자 ju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