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영국 런던에서 백야를 처음 경험했을 때가 이따금 떠오르곤 한다. ‘엷은 어둠의 시간을 마음껏 즐기리라’며 템스강 위를 경쾌하게 지나던 때가 말이다. 엄밀히 백야는 아니고 희미하게 어두운 밤인 트와일라잇이었다. 때는 밤 아홉 시. 기네스를 곁들인 피시앤드칩스를 꿈꾸며 식당을 찾는데, 굳게 닫힌 문마다 ‘영업종료(closed)’ 안내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굶주린 여행자에게 이토록 야멸찬 도시라니. 배가 고프니 화가 났고, 공복의 울적함이 트와일라잇의 낭만을 축출했다.
배가 고프면 로망 따위가 설 자리는 없다. 곰곰 생각해보면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상적이고, 아름답고, 따뜻하고, 가슴 벅차오르게 만드는 많은 것들은 약한 타격에도 속절없이 무너지곤 한다. 원시적 본능이나 말초적 욕망 같은 것과 맞대결했을 때는 더더욱 여지없다. 생존과 결부된다면 더 이상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은 쉽사리 식지 않는다. 이를테면 한강변을 에워싼 아파트 풍경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탄식하는 것도 그렇다. ‘이토록 아름다운 한강이 온통 아파트에 둘러싸여 있다니 살풍경하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물론 요즘은 ‘저게 다 얼마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런 낭만도 있다. 늦은 밤엔 배달 오토바이가 주택가를 질주하지 않고, 새벽에는 택배차가 주택가를 지나지 않고, 그리하여 한밤중엔 풀벌레 소리와 묵음의 여명이 공간을 채우는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상상 말이다. 이걸 낭만적인 상상으로 여기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새벽배송 없이 무탈하게 살던 시절이 10년도 되지 않았으므로 ‘왜 비현실적이냐’는 반박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산업의 특성을 고려하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른다.
일단 노동자가 새벽에 잘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주장은 제기됐다. 택배 사회적대화기구 1차 회의에서 민주노총 산하 택배노조는 0시부터 오전 5시까지 초심야 배송 금지를 제안했다. 이유 또한 타당하다. 국제암연구소가 ‘연속적 고정 야간노동’을 2급 발암물질로 규정할 만큼 노동자의 건강권을 해치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심야노동을 아예 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 주장은 곳곳에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새벽의 흐름이 막연히 떠올리는 것보다 더 촘촘하고 복잡하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새벽배송은 ‘생산자-판매자-물류센터-배송기사-소비자’ 크게는 다섯 주체가 연결돼 있다. 여기서부터 막힌다. 대형 플랫폼과 택배 노동자 간 문제, 갑과 을의 대결 구도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이해관계가 다양한 사람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농어민이나 소상공인 같은 생산자, 대기업뿐 아니라 소상공인을 포함한 판매자, 물류센터 운영사와 종사자인 노동자, 배송기사, 그리고 소비자까지 모두 영향권에 들어선다. 몇몇 주체는 생존과도 직결돼 있다.
수많은 사람이 얽혀 있는 데다 공급과 수요가 맞아떨어져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시장을 인위적으로 해체하자고 하는 것은 난센스다. 편리한 소비를 위해 노동자가 고통받는다는 식의 접근은 통하지 않는 게 확인됐다. 그리고 ‘모두가 쉬고 있는 새벽’이란 건 없다. 종합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소방관이나 경찰관뿐 아니라 공장의 야간 근무자, 청소 노동자, 편의점 주인, 심야 조업을 하는 어부 등 수많은 이들이 새벽에 일한다. 새벽배송이 없는 세상을 시도하는 대신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과격한 제안이 갈등의 골만 깊게 만든 것 같아 안타깝다.
문수정 산업2부장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