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그래미 문턱 넘은 K팝

입력 2025-11-13 00:40

‘축음기(Gramophone)’에서 이름을 얻은 그래미(Grammy)는 1959년 첫 시상 이후 반세기 넘게 미국 대중음악계의 대표 권위로 자리해왔다. 설립 초기 투표 회원 구성이나 장르 인식의 측면에서 다양성은 부족했으며, 재즈·소울·로큰롤조차 주류 팝의 외곽으로 분류되던 시절도 있었다. 1970년대 영국의 롤링 스톤스와 엘튼 존, 퀸이 미국 차트를 휩쓸고 스타디움을 가득 채웠지만, 그래미의 반응은 한참 늦었다. 이들은 세계적 인기를 얻고 나서야 후보에 오를 수 있었고, 비틀스조차 미국 진출 후 몇 년이 지나서야 주요 부문 후보가 됐다. 그래미는 오랫동안 영미권 안에서도 미국 중심의 보수적 잣대를 고수해왔다.

100개 가까운 트로피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빅4’로 불리는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올해의 앨범, 최우수 신인상이다. 이 네 부문은 그래미의 핵심이며, 동시에 진입이 가장 어려운 영역이다. 비영어권 노래가 이 부문을 수상한 사례는 1959년 이탈리아 가수 도메니코 모두뇨의 ‘볼라레’가 유일하다. 그래미의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 보여준다.

그 앞에 K팝이 섰다. 내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제68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블랙핑크 로제의 ‘아파트’가 올해의 노래와 올해의 레코드 등 3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OST ‘골든’도 올해의 노래를 포함해 5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K팝으로 분류된 노래가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아파트와 골든의 글로벌 인기를 감안하면 예상된 수순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미의 보수적 역사를 떠올리면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미가 한국의 감성과 언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다만 두 곡 모두 대부분 영어 가사로, 전형적인 미국식 협업 시스템과 작법을 따르고 있긴 하다. 그래미가 K팝을 포용했다기보다, K팝이 그래미의 문법을 스스로 익혀 그 문턱을 넘어선 셈이다. 내년 천사의 도시에서 들려올 낭보를 기대해 본다.

한승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