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대동맥’ 해저 케이블… HVDC 앞세운 韓 기업 뜬다

입력 2025-11-13 02:16
게티이미지뱅크

바다 밑을 가로지르는 해저케이블 전력망이 전세계 에너지 지형을 바꾸고 있다. 해상풍력 단지 확대와 인공지능(AI) 시대 전력 수요 급증이 맞물리면서 장거리·대용량 송전 기술인 초고압직류송전(HVDC) 해저케이블 시장도 급성장하는 추세다. 국내에서도 이재명정부의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 가시화 등으로 전력 업계 경쟁이 치열하다. 주요 기업들이 앞다퉈 대규모 투자와 연구개발(R&D)에 나서며 유럽의 전통적 강자들이 주도하던 해저케이블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풍력·AI 바람에 해저케이블 급성장

해저케이블은 데이터를 전송하거나 전력을 보낼 때 쓰이는 장거리 인프라다. 지중 케이블과 원리는 같지만 심해의 극한 환경을 견뎌야 하고 유지 보수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기술력을 가진 프리즈미안(이탈리아), 넥상스(프랑스), NKT(덴마크), 스미토모(일본), LS전선(한국) 등 소수 기업이 글로벌 해저케이블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수백~수천㎞ 거리에도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전력을 보낼 수 있는 HVDC 케이블은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핵심 기술로 꼽힌다. 특히 대규모 해상풍력 단지에는 필수적으로 대규모 해저케이블 인프라 구축이 뒤따라야 한다. 2030년 해상풍력 설비가 지난해 대비 3배 이상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해저케이블 산업이 주목받는 이유다.

막대한 전력을 빨아들이는 AI 데이터센터 역시 해저케이블 수요를 밀어올리는 요인이다. 시장조사기관 프리시던스 리서치는 세계 해저케이블 시장 규모가 올해 229억 6000만달러(약 32조)에서 2034년 548억 1000만 달러(약 77조)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업계 관계자는 “오래된 해저케이블의 교체 시기와 재생에너지·AI 발전 시기가 겹치면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해저케이블 전력망은 국가 기반 산업인데다 한번 설치하면 수십년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기술 장벽이 높다”고 말했다.


현 정부는 호남권에서 생산한 풍력·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를 수도권 등 대도시로 전달하기 위해 2030년까지 약 620㎞ 길이 HVDC 전력망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11조원 규모의 초대형 프로젝트인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이다. 설계·시공 기간을 고려하면 1단계 사업인 2기가와트(GW)급의 전북 새만금~경기도 화성 구간(220㎞)의 입찰·계약은 내년 상반기에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제조·포설·변압기도 경쟁 치열
LS전선 직원들이 선적 중인 해저케이블을 점검하고 있다. LS전선 제공

해저케이블 산업을 구성하는 축은 케이블 생산 분야, 설치(포설) 분야, 변압기 등 변환설비 분야다. LS전선은 LS마린솔루션과 함께 해저케이블 제조와 포설을 한 번에 제공하는 ‘턴키(일괄공급) 솔루션’을 앞세워 사업을 확대하는 중이다. LS전선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HVDC 해저케이블 송전망을 구축한 경험이 있고, 현존 케이블 중 최대 송전 용량인 525킬로볼트(kV) HVDC 양산 체제를 갖추고 있다.

직원들이 초고압직류송전(HVDC) 케이블을 테스트하는 모습. LS전선 제공

해외 시장에서의 수주 성과도 뚜렷하다. 지난 1월에는 대만 해상풍력 시장에서 약 1600억원 규모의 해저케이블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10회 연속 수주를 달성했다. 미국에서는 약 1조원을 투자해 현지 최대 규모의 해저케이블 생산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대한전선도 HVDC 해저케이블 시장 진입을 위한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 최근 충남 당진에 HVDC 해저케이블 2공장을 착공했으며, 2027년 가동을 목표로 1조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LS마린솔루션이 올해 1만t급 초대형 해저케이블 포설선을 건조하겠다고 발표한 가운데 대한전선도 대용량 HVDC 케이블을 설치할 수 있는 추가 포설선 도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을 계기로 포트폴리오를 확장하겠다는 전략이다.

변압기 등 설비 분야에서는 효성중공업과 HD현대일렉트릭, LS일렉트릭이 변환기술 국산화를 놓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해상풍력 단지에서 생산된 교류 전력을 직류로 바꿔주는 HVDC 변환용 변압기는 대용량 해저케이블 운영을 위한 핵심기술로 평가된다. 특히 실시간으로 양방향 전력 흐름을 제어할 수 있는 전압형 HVDC는 전류형 HVDC보다 재생에너지 연계에 유리하다.

효성중공업은 지난해 국내 최초로 200메가와트(㎿)급 전압형 HVDC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2017년부터 1000억원을 투자한 결과다. 창원공장 내 부지에 2027년 완공 목표로 국내 최대 HVDC 변압기 생산기지도 구축하고 있다. 기존 설비 역량에 2GW급 HVDC에 필요한 대용량 변압기 기술을 더해 HVDC 토털 솔루션 제공사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글로벌 업체와도 합종연횡

HD현대일렉트릭은 지난달 HVDC 분야의 선도 기업인 히타치에너지와 기술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양사는 변환설비·변압기·제어시스템 등 HVDC 송전망 시스템 전반에 대한 최적의 기술 협력 방안을 논의해 나가기로 했다. 또 울산 사업장 내 건설 중인 신공장을 HVDC 변압기 전용 생산시설로 활용해 경쟁력을 강화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LS일렉트릭 역시 지난 7월 글로벌 에너지 기업 GE버노바와 HVDC용 변환 설비 국산화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LS일렉트릭은 부산사업장 유휴부지에 공장을 증설하고 초고압 변압기 사업을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500kV 전압형 HVDC 변환용 변압기 기술개발’ 연구 과제에도 효성중공업 HD현대일렉트릭 LS일렉트릭 일진전기 4개사가 최종 사업자로 선정됐다. 기술 개발에 성공하면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 제품 공급자 후보군에 오른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