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의 그래도] 용서함으로 승리할 것인가, 억울함의 분노로 자멸할 것인가

입력 2025-11-12 03:08
게티이미지뱅크

몇 년 전 배우 K는 예능에서 보여준 선한 이미지와 연극, TV 드라마에서의 탄탄한 연기력과 준수한 외모로 인기 정상에 올랐다. CF 광고가 쇄도하고 드라마와 영화 제작자들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 출연했던 드라마를 찾아 역주행하는 팬들이 늘어나고 해외에서도 팬덤 현상이 이어졌다. 말 그대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그가 출연한 드라마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몇 주째 넷플릭스 1위를 차지하던 최고의 순간, 그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옛 여자친구가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음해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여지는 선한 이미지와 달리 K가 스태프들에게 갑질을 하는 등 인성에 문제가 있으며 인기가 올라가자 여자친구인 자신에게 낙태를 종용하고 헤어졌다는 것이다. 그가 출연 중이던 예능 프로그램 제작진은 그의 촬영 분을 가린 채 방영했고 즉시 그를 프로그램에서 하차시켰다. CF 광고와 차기 드라마 촬영도 줄줄이 취소됐다.

그러나 몇 주 뒤 반전이 일어났다. 그의 친구들과 과거 여자친구의 친구들이 인터넷에 정반대의 글을 올렸고 이를 한 연예매체가 보도하면서다. 과거 여자친구가 남자 문제가 많음에도 K가 매번 용서하고 넘어갔고 아이를 낳자고 하고 결혼하기 위해 부모님께 인사를 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여자친구가 낙태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연극무대를 전전하고 드라마 서브 주연으로 별 볼 일 없던 옛 남자친구가 인기 정상으로 치닫는 것을 보고 옛 여자친구가 악의적인 글을 올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K는 침묵했다. 소속사를 통해 반박할 법도 한데 자신도 잘못이 있다며 바로 인정하고 배우를 그만두려 했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거짓말 한마디에 갑자기 등 돌리는 세상에 느끼는 배신감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그는 예능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눈꺼풀도 떠지지 않는 상태에서 촬영 스태프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같이 출연하는 개그맨과 텐트 안에서 잠들면서 “형, 저 괜찮은 놈이에요”라고 말한다. 선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연극무대에서 다져진 탄탄한 연기력으로 드라마 주연까지 꿰차고 한창 주가를 올렸지만 그는 한마디 변명도 없이 사라졌다.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TV로 복귀하지 않고 연극무대로 돌아가 실력을 연마하고 기존의 캐릭터와 다른 누아르 영화로 복귀를 알렸다. 올해 초에는 인기를 끌었던 넷플릭스 드라마에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깜짝 출연을 하고 하반기와 내년 드라마 복귀를 앞두고 있다.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심판하실 것

인생을 살면서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하는 것이 어디 한두 번이랴. 내가 한 일이 아닌데 덮어 써야 하는 경우도 있고, 내 잘못이 아닌데도 정작 잘못한 사람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일도 부지기수다. 심지어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험담이나 뒷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없는 말을 지어내 흔들어대고 뒤통수를 친다. 믿었던 사람마저 등 돌리고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아들같이 믿었던 브루투스에게 칼을 맞은 카이사르처럼. 권력욕이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서든 거짓과 음해가 난무하는 세상이다.

한바탕 광풍이 몰아칠 때는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 악의적 여론몰이와 마녀사냥이 반복된다. 진실은 끼어들 틈이 없다.

저주 시(詩)라고도 불리는 시편 109편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을 빌면서도 한편으론 대적을 향한 살벌한 저주를 쏟아낸다.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시 109:8~10)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분노가 치미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다고 시편 저자처럼 저주를 퍼붓고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은 소모적인 일이다. 분노와 상처는 자신을 황폐화시킬 뿐이다. 배신하거나 상처를 준 사람은 정작 아무렇지도 않은데 영적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미국 켄터키주 윌모어연합감리교회 담임 목사로 22년간 사역한 데이비드 시맨즈는 저서 ‘탓’에서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고 쓴 뿌리를 계속 품고 사는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없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모든 생활이 가해자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했다. 그는 환경과 주변인 탓만 할 게 아니라 피해의식에서 빠져 나와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치유와 회복의 길이 열린다고 했다.

홍정길 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마음 다스리는 법을 제시한다. 그는 젊을 때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무를 맡아 젊은이들을 전도하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런데 비판이 쏟아지고 나가라고 하니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우울증이 왔고 몸이 붕 떠 있는 것 같아 잠도 잘 수 없고 숨도 안 쉬어졌다고 한다. 공황장애를 4개월간 겪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 속에서도 밥 먹는 것처럼 성경을 읽었는데 어느 날 로마서 15장 말씀이 생각났다. “내가 심판주다. 내가 원수를 갚으리라. 만약 하나님이 심판주가 아니라면 억울한 일이나 착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계속 당하기만 하고 속이고 나쁜 사람들은 잘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반대로 좋은 일을 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때는 천국에서 받을 상급이 클 것이다 생각하자. 천국 입성하면 두 가지로 나뉜다. 착하고 신실한 종과, 악하고 나쁜 종이다.”

성경 속 억울함과 용서

요셉은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고 애굽으로 팔려갔다. 그러나 애굽의 총리가 돼 형들을 벌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복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대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했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요셉도 13년간 끔찍한 일들을 겪었지만 그들을 원망하거나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결코 자기가 입은 피해를 핑계 삼지 않았고 자신이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갖지도 않았다. 오히려 전능자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앙과 자존감,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승리할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분노는 영적으로 건강한 일이지만 원한으로 남을 때까지 계속 분노를 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마귀에게 공격의 빌미를 준다고 경고한다.(엡 4:26~27) 예수님도 제자들한테 배신당했고 버림받았고, 짓지도 않은 죄를 추궁당했다. 그는 죄가 없는 데도 모든 불의와 죄악의 피해자가 되셨다. 하지만 “저들이 모르고 하는 일이니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복음은 ‘하나님의 용서’다.

예수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라고 하셨다. 우리가 다른 이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진실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

예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지 말고 오히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주라고 가르쳤다.(마 5:38~39)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의미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눅 6:27~28)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라는 내용이 담긴 주기도를 가르치시고 나서 굳이 더하는 결론 같은 선언이 용서에 대한 강조였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율법에서 유래한 표현도 피해자가 받은 손해와 동일한 손해만 가해자에게 돌려주라는 의미다. 피해자가 받은 만큼만 보복하라는 의미로, 과도한 복수를 금지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이었다. 누군가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그 사람의 눈만 상하게 하라는 뜻이지 목숨 등 그 이상을 해치라는 것이 아니다. 보복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을 강조한 것이다.

이명희 논설위원·종교전문기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