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에 왔고, 병상에 있던 나를 찾아와 예수를 영접하게 해준 친구도 어찌 된 연고인지 미국에 와서 가디나개혁신학교를 같이 다녔다. 우리는 같은 신학교, 같은 노회, 같은 총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 친구가 내 인생을 두고 한 말이 있다. “김 목사는 ‘뭣도 모르는 은혜’를 받았어.” 맞다. 무모할 만큼 인생을 뒤집는 결단, ‘뭣도 모르는 은혜’. 마흔에, 가정이 있고, 일궈 놓은 회사가 있고, 병상에 계신 어머니까지 계실 때, 회사 하나 정리하지 못한 채 아내와 두 자녀, 어머니를 뒤에 두고 9월 학기 신학교에 입학하겠다며 가방 하나 들고 서울을 떠났다.
인천 형님댁에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어머니는 병상에서 “왜 미국에 가야 하니? 나 죽거든 가거라”고 하셨다. 그러나 내 머릿속엔 ‘9월 등록’ 생각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한 달 뒤 주님 품에 안기셨다. 장례가 다 치러진 뒤에야 한국에 도착했다. 그럼에도 집안 대대로 믿어 오던 미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할 때면 하나님께 드린 감사와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의 마음 사이에 작은 위로를 얻는다.
모든 것을 버렸다. 지금도 그 무모한 결단을 떠올릴 때면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는지 내 성미대로 한 결단이었는지 자문한다. 그때마다 ‘내 삶의 전과 후’를 비교해 봄으로써 답을 구한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리고 또 묻는다. “내가 아직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뜻이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살도록 하시는 결단의 분기점임을 확신한다.
가방 하나 들고, 가족과 이별하고 김포공항을 떠났다. 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 풀러턴의 큰형님 댁으로 왔다. 형님은 장손이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 넷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 평생 일군 그룹까지 넘어간 뒤 형님도 미국으로 왔다. 한국에서 내가 형님을 많이 도왔던 터라, 내 갑작스러운 변화를 믿기 어려워 했다.
한국의 둘째 형님도, 미국의 큰형님도, 내가 한국에서 돈을 빼돌려 미국에서 살려는 술수라고 오해했다. 가족 간 오해가 깊어 한국에 남아 있던 아내가 큰 고생을 했다. 내가 떠난 뒤로 아내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전철과 택시를 갈아타고 인천 본가로 가 병시중을 들고, 다시 새벽에 아이들을 깨워 학교 보내고를 반복했다. 미국 들어오는 날까지 그렇게 했다. “미국에 가면 언제 또 뵐지 몰라서라도,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라고 아내는 말했다.
광야와 개척의 시간, 미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형님댁에서 개혁신학교에 등록하고 가디나로 통학했다. 생각지 못한 갈등도 시작됐다. 큰형님과 형수님은 내가 큰돈을 들고 왔다고 생각했다. 자동차와 세탁소, 생활비에 대한 요구가 이어졌다. 처음 겪는 갈등이자 시험이었다. 나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두 달 뒤, 아내와 아이들이 여행 비자로 입국했다. 풀러턴에 아파트를 얻고 복음장로교회에 출석했다. 가족이 온 다음 날, 우리는 이른 새벽 풀러턴의 크레이그 리저널 파크에서 예배를 드렸다. 아내와 아이들은 한 달 사이 달라진 남편과 아빠를 보며 의아해 했다. “주님, 이 시작이 주님과 함께하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소서.”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정리=전병선 선임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