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12월 21일]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입력 2024-12-21 03:10

찬송 : ‘나의 영원하신 기업’ 435장(통492)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마태복음 22장 15~23절


말씀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화해자(peacemaker)의 직분과 메시지를 부여받은 교회는 마땅히 가이사의 방식이 아닌 그분의 방식으로 세상에 샬롬을 구현하고 확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나라의 통치자(가이사)가 다스리는 현실을 사는 우리가 그 역할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빌 3:20)은 세상 나라의 법과 규정은 무시해도 될까요. 아니면 깊은 산이나 먼 섬으로 도피해서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세상과 격리된 채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할까요.

본문의 예수님 말씀이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나라 백성에게 요구되는 납세 의무를 무시한 채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는 없겠지요. 세상 나라와 권력은 타락의 영향 아래 있으므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허용하신 국가와 사회 제도를 그리스도인도 마땅히 존중하고 의무를 다하는 게 기본 상식입니다.

그러나 가이사의 방식이 샬롬의 근본적 해법은 아닙니다. 가이사의 방식은 하나님의 방식과 다를 뿐 아니라 자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성탄 기사가 보여주는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휴전이나 정전 상태, 즉 가이사가 최선을 다하면 이뤄낼 수 있는 무탈한 상태가 아닙니다. 샬롬은 가이사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역설적 방식을 통해 우리가 지금 누리는 샬롬을 세상에 확산하는 방식은 세상 통치자나 학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십자가의 방식이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두 왕국 사이에 낀 정체성의 혼란이 있고 서로 다른 가치관과 방식으로 인한 판단과 분별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가이사의 어떤 체제나 방식도 성경적 샬롬의 해법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경고를 우리네 현실에 적용한다면 교회가 좌파나 우파의 편향성으로 기울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좌파 가이사’든 ‘우파 가이사’든 ‘사회주의 가이사’든 ‘자본주의 가이사’든 그에게서 본질적 해법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이사 왕국의 시민으로서 정당이나 정책을 평가하고 참정권을 행사하는 것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는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집단적으로 특정 체제나 이데올로기 편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편들기가 아니라 특정 사안에 대해 선지자적으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해야 합니다. 극심한 확증편향이 현대 사회의 문제인데 교회마저 양극화의 선봉에 서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2022년 11월 미국의 퓨리서치센터는 확증편향의 양극화가 가장 심한 두 나라로 미국과 한국을 든 바 있습니다. 좌우 대립으로 분열된 세상에 샬롬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몸답게 교회는 화해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기도 :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 샬롬을 이루어가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화해와 평화를 이루며 세상에 그리스도의 샬롬을 전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정민영 은퇴 선교사 (전 국제위클리프 부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