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휴양지인 미국 하와이는 일제 시대 조국 독립운동의 해외 전진 기지이기도 했다. 한인 독립투사들은 우리나라의 첫 공식 이민자들인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과 함께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조국의 미래를 위한 희망을 심었다. 광복 79주년을 맞아 하와이에 남겨진 구국을 위한 기도와 헌신의 흔적을 찾아가 봤다.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하와이 오아후섬 호놀룰루 공항에서 차를 타고 동쪽으로 10여분쯤 달리자 ‘오아후 공동묘지’에 닿았다. 초록 잔디에 세워진 빛바랜 비석이 눈길을 붙잡았다.
축구장 2개 반(1만7000㎡) 크기의 공동묘지엔 일제 치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쳤던 1200여명의 한국인이 묻혀 있다. 이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이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이들이 더 많다. 묘역 곳곳엔 한글로 된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남성 성도’ 대한인동지회의 조국 사랑
묘비 가운데 십자가 두 개와 그 아래 영어 ‘MIN’과 한자 ‘閔(민)’이 크게 새겨진 비석 앞에 섰다. ‘대한인동지회’ 공동 설립자 민찬호 목사의 묘다. 대한인동지회는 1921년 7월 14일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민찬호·이종관 목사, 안현경 선생과 함께 만든 독립운동단체다.
허상기 한미동맹재단하와이 사무총장은 “대한인동지회는 남성으로만 구성된 단체였는데 거의 모든 단원이 한인기독교회 성도라고 봐도 무방하다”면서 “이들 대부분은 한국에 가족을 남겨두고 혈혈단신 이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세상을 떠났다”고 설명했다.
묘지 한쪽엔 한글로 ‘고맙습니다’가 새겨진 비석도 있었다. 지난해 9월 미주한인재단 하와이와 국가보훈부가 한인 이민 120년을 맞아 무명 독립운동가를 기리며 헌정한 ‘감사비’였다.
오아후 공동묘지에서 동쪽으로 10분 더 달려 도착한 ‘카할라 공동묘지’. 동지회 회원들이 묻힌 이곳엔 작은 비석이 늘어져 있었고 일부는 심하게 기울어 있기도 했다.
묘비엔 동지회(DONG JI HOI) 명칭이 영어 철자로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다. 카할라 묘역은 지난해 독립기념관이 무명 독립운동가 발굴을 위한 ‘묘비 탁본 프로젝트’를 통해 발견됐다. 이곳에서만 106명의 묘지가 발견됐는데 상당수가 동지회 출신이다.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1920년까지 5000명 넘는 하와이 한인이 독립운동에 참여했지만 공로를 인정받은 이는 70여명에 불과하다.
‘기독교 정신’ 품은 3단체 활약
하와이에서 활동한 핵심 독립운동 단체로는 대한인동지회 외에 한인기독교회와 한인기독학원이 꼽힌다. 이들 단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기독교 정신’이다. 이들 단체는 상호 협력하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립운동을 음양으로 후원했다. 한인 사회는 물론 하와이 다민족 사회 발전에도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다.
독립을 위한 또 다른 축은 교육이었다. 6일에는 카할라 공동묘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쿨라 콜레아 지역의 칼리히 초등학교를 찾았다. 쿨라(Kula)는 학교를, 콜레아(Kolea)는 코리아에서 따왔다. ‘한국 학교’로 일컬어지는 명칭처럼 이 지역은 과거 한인기독학원의 터였다. 규모만 3.65에이커(약 4400평)에 달한다. 이 전 대통령이 1918년 알리이올라니 학교를 임대해 개교한 한인기독학원은 1922년 이곳으로 이사해 1947년까지 운영됐다. 기숙학교였던 학원은 역사와 기독교 등의 교육이 이뤄졌다.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지만 학교 입구엔 한인기독학원 옛터를 알리는 현판이 남아 있었다.
또다시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한인기독교회(이제호 목사). 광화문 문루를 본뜬 교회 건물은 독립 열망을 품은 선배 신앙인들의 헌신을 묵상할 수 있는 장소라 할 만했다. 하와이 한인의 정신적 고향으로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허 사무총장은 “한인기독교회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면서 “선조들은 독립투쟁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갔다. 교회를 설립한 이 전 대통령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이뤄졌던 장소”라고 강조했다.
호놀룰루(하와이)=글·사진 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