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를 미리 외워왔는데 못 불러서 아쉬워요. 다음 올림픽에서는 꼭 부르고 싶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 허미미(21·경북체육회)가 태극마크를 달고 할아버지 허석(1857∼1920) 선생의 묘소에 올림픽 메달을 바치겠다는 꿈을 이뤘다. 생애 첫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침체기에 빠진 한국 여자 유도계에 반등의 계기를 마련했다.
허미미는 2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샹드마르스 경기장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여자 57㎏급 결승전에서 세계랭킹 1위 크리스타 데구치(캐나다)에게 반칙패해 준우승을 거뒀다. 정규시간 안에 승부를 보지 못해 연장전(골든스코어)에 접어든 뒤 지도 3개 누적으로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한국 여자 유도 은메달은 2016 리우데자네이루 대회 48㎏급 정보경 이후 8년 만이다.
허미미는 재일동포 3세로 2022년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태극마크를 달았다. 소속팀 경북체육회에 입단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가 허석 선생의 5대손이라는 점도 밝혀져 이목을 끌었다.
경기 후 다시 할머니를 떠올린 허미미는 “(할머니에게) 오늘까지 유도 열심히 했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고 말하고 싶다”고 4년 뒤를 기약했다.
4년 뒤 그의 활약을 기대하는 건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김미정 유도 대표팀 감독은 “허미미는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이라며 “보완할 점이 보이긴 하지만 조금만 다듬어 나가면 다음 올림픽에선 금메달도 충분히 딸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타고난 골격과 근력이 가장 큰 강점이다. 동 체급 선수들보다 체구가 작지만 쉽게 지치지 않아 장기전에 접어들수록 유리하다. 이날 치른 4번의 경기 중 3차례나 연장전을 겪었음에도 허미미는 지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김 감독은 “다른 선수들의 경우 골든스코어에 접어들면 숨이 헐떡헐떡 넘어가는데 미미는 그런 게 없다”며 “평소에 훈련량이 많은데도 잘 따라온다”고 말했다.
성격도 모난 곳이 없어 힘든 일은 훌훌 털어내고 좋은 건 빨리 흡수한다. 태극마크를 단 뒤 2년째 일본에 사는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고 있지만 얼굴에 그늘 한 번 진 적 없다.
김 감독은 “올림픽에 오기 전에 선수들을 대상으로 자체 심리 검사를 진행했는데 미미는 불안, 우울 수치가 0이 나왔다. 의사도 ‘이런 사람이 없다’고 깜짝 놀랄 정도였다”며 “항상 밝고 무언가 성취하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풀어낼 줄 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유도를 즐긴다. 취미도 아닌 엘리트 체육을 ‘좋아서’ 하기란 쉽지 않은데도 허미미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오직 그것뿐이다. 은메달을 따고 선수촌에 복귀하는 길, 김 감독은 허미미와 면담 중에 “다시 태어나면 무얼 하고 싶을 것 같냐”고 물었다고 했다. 허미미는 망설임 없이 “유도”라고 답했다. 이유는 멀리 있지 않았다. 그는 “유도가 정말 좋다”는 말만 거듭하며 은메달을 만지작거렸다.
파리=이누리 기자 nur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