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림택권 (3) 열한 살 때 해방, 다시 교회 부흥하며 담임목사 부임

입력 2024-01-18 03:04
림택권(오른쪽) 목사가 1953년 강원도 춘천고등학교 재학 시절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당시 한국은 일제 치하에 있던 터라 기독교에 배타적이었다. 성경과 찬송가에 ‘왕’이라는 글자는 죄다 먹으로 칠했다. 시골이었지만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더 심했다.

1941년 시험을 치고 면 소재에 있는, 지금으로 말하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는 한창 2차 세계대전 중이었기에 음악 시간이면 교실에 있던 풍금으로 적군과 아군의 비행기 소리를 구별하는 법을 가르쳤다.

악랄했던 일제하 학교 분위기도 기억난다. 담임 선생님은 조회 후 급장이라 불리는 지금의 반장에게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의 나무패를 나눠줬다. 그러면 그 급장은 하교 시간 전까지 한국말을 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 패를 그 친구에게 준다. 만약 그 패를 받은 아이가 하교 시간까지 그 패를 갖고 있다면 선생님으로부터 된통 혼이 났다. 아이들은 나무패를 몰래 숨기고 있다가 다른 친구가 한국말을 하면 똑같이 전달했다. 한마디로 친구끼리 서로 감시하게끔 만든 학교 시스템이었던 셈이다. 그런 분위기 탓이었을까. 어렸을 때만 해도 난 스스로 일본인이라 생각했다. 부모님께서 행여라도 한국말을 하시면 “어머니, 조선말 하면 큰일 나요!” 하며 곧잘 화를 냈다.

이후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1945년 해방되고 나서 한국인 정체성을 다시 찾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섭다. 어렸을 때부터 주입된 세뇌 교육이 그만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열한 살 되던 그해 8월 15일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됐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1시간 넘게 떨어진 면사무소까지 흰옷을 입고 걸어가며 “대한민국 독립 만세”를 외치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저 동네 어르신 뒤를 따라가며 “만세”를 불렀다. 어디서 났는지 아버지 역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셨던 기억도 난다. 또 우리 집 앞마당에 심긴, 진드기가 많이 앉아있던 나무가 바로 무궁화였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동네 형들은 해방을 맞이하자 일본인들이 빼앗아 간 교회 풍금을 다시 찾아왔다. 그 이후로 황촌교회는 다시금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교세가 커지자 교회를 전담할 목사님 한 분을 모셔올 수 있게 됐다. 이전까지는 담임 목사님이 한 교회만 전담하기 힘들 때라 전도사님이 주로 교회를 돌보셨다. 담임 목사님은 3주에 한 번 오실까 말까 했다.

그렇게 장형일 목사님께서 부임하셨다. 장 목사님에 대한 기억은 그의 사택에 있던 서재 풍경이 강하게 남아있다. 시골이라 책은 30여권 정도에 불과했지만 내게는 마치 지금의 국회도서관 같았다. 그중 두꺼운 책 한 권을 보게 됐는데 거기에는 ‘박형룡 박사 저’, ‘신학난제선평’이라고 한자로 적혀 있었다. 그 책이 박형룡 목사님께서 1935년 한국보수주의 신학의 확인과 계승을 위해 저술한 책이었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그때 내가 꽂힌 단어는 ‘박사’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단어 같았다.

“목사님, 목사님! 박사가 뭐예요?”

동그란 눈으로 묻는 내게 장 목사님께서는 “응, 미국에 가면 받을 수 있는 거야”라고 답해주셨다. 미국.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곳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졌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