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은 패션이다] 유명인들의 육아 체험… 순수한 동심 어우러져 시청률 ‘날개’

입력 2021-04-24 04:07
배우 이종혁과 아들 준수가 2013년 1월 6일 처음 방영된 MBC ‘아빠 어디 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방송에선 다섯 아빠(성동일 김성주 이종혁 송종국 윤민수)가 엄마 없이 아이들과 1박 2일간 강원도 오지마을 품걸리로 여행을 떠난 모습을 담았다. 아래 사진은 지난 18일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가수 장윤정과 아나운서 도경완의 자녀인 연우(왼쪽)와 하영이 인터뷰를 하는 장면. MBC KBS 제공

내용이 중요하지 제목이 뭐 대수냐는 의견엔 숙고가 필요하다. 끌리는 제목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게 아니라 ‘보이면 비로소 멈추게’ 만들기 때문이다. 눈길 끄는 제목, 마음을 훔치는 제목은 진열대가 따로 있다. 모처럼 들른 서점에서 ‘투자의 비법’이나 ‘자산과 부채’라는 글자를 보고 가던 길을 멈추지는 않으리라.

잘 지은 제목은 처음 눈에서 시작해 천천히 손으로 향하고 마침내 계산대로 발을 이끈다.기억을 소년 시절로 되돌려준 책은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였다. 제목은 미끼에 불과했다. 몸통은 재산증식에 관한 얘기다. 저자는 돈에 대한 인식을 바꾸라고 조언한다. 인생을 바꿀 수 없다면 인생관을 바꾸라는 말로 나는 해석을 확장했다. 자, 그런데 아빠는 과연 바꿀 수 있을까. 그럴 순 없으니 아빠를 보는 시각이나 시선을 바꾸는 것도 한 번쯤 해볼 만한 시도다.

나의 아빠는 가난한 아빠였다. ‘어린 왕자-내 안의 구도자’(박규현 지음)라는 책의 표지에 이런 말이 적혀있다. ‘모든 어른의 마음속에는 울고 있는 아이가 있다.’ 아빠는 사라지고 내 속엔 울고 있는 아이 하나가 남았다. 세어보니 돈은 얼마 없어도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 1억 만들기도 좋지만 추억 만들기 역시 유익한 건 확실해 보인다.

추억은 오늘도 노래와 동행한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메이뇨/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 ‘따오기’는 1925년 윤극영이 발표한 동요인데 그로부터 40년 후(1965) 어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에 동시에 등장한다. 영화 제목은 ‘저 하늘에도 슬픔이’다. 내겐 극장에서 서러움이 복받친 최초의 영화였다. 흑백영화 속 주인공(이윤복)의 처지에 감정이 이입됐기 때문이리라.

주인공은 나처럼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무능한 아빠를 남기고 엄마는 사라졌다. 소년가장 윤복은 고난 중에도 일기를 쓴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던 시기에 눈물로 쓴 소년의 ‘난중일기’가 바로 ‘저 하늘에도 슬픔이’다. 그 일기를 세상에 알린 건 담임선생님이었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온정이 줄을 이었고 집 나간 엄마도 돌아왔다. 돈의 힘인가, 사랑의 힘인가. 이 영화는 동일한 감독(김수용)과 각색(신봉승)으로 1984년 리메이크된다. 영화의 파급력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낙동강 강바람이’로 시작하는 ‘처녀뱃사공’을 들으면 윤복의 동생 순나가 버스에서 껌을 팔며 노래 부르던 장면이 지금도 떠오른다.

비슷한 영화가 또 있다. 소년가장의 일기가 모티브인데다 동요로 시작하는 점이 닮았다. 이번엔 ‘오빠생각’이다. ‘따오기’가 나온 1925년 최순애가 지은 시에 1930년 박태준이 곡을 붙였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영화 제목은 그 유명한 ‘엄마 없는 하늘 아래’다. 가출한 게 아니라 돌아가셨다는 점에서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 약간 다르다. 이 영화는 1977년 한 해에 속편까지 나왔고 이듬해엔 3편이 개봉됐다.

과거가 발목을 잡다 보니 부자 예능까지 가는 길이 좀 길었다. 하지만 길을 잃은 건 아니다. 오늘 말하는 부자 예능에서 부자는 돈 많은 ‘부자 순위’의 부자가 아니라 정 많은 ‘부자유친’의 부자다. “아빠 어디 가.” 난 평생 이런 질문을 해보지 않았다. 아빠가 늘 집에 계셔서가 아니라 늘 집에 안 계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리운 것을 그린다는데 나는 아빠를 그린 적이 없다.

개그맨 이홍렬씨가 쓴 책이 어느 날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제목이 아뜩하다. ‘아버지 되기는 쉬워도 아버지 노릇 하기는 어렵다’ 제목이 눈에 쏙 들어온다. 책을 펼치니 작은 제목들도 그에 못지않다. ‘아빠 제 입장 좀 생각해주세요’ 그러나 내 눈이 오래 머물게 한 소제목은 따로 있었다. ‘잘나도 아버지 못나도 아버지’

부자 예능엔 잘난 아빠들이 주로 나온다. 적어도 한때 잘나가던 아빠들이어야 나올 수가 있다. 두 프로를 비교하자면 ‘아빠 어디 가’(MBC 2013-2015)는 야외로 나간 부자들의 기행문이고 ‘슈퍼맨이 돌아왔다’(KBS2TV 2013-현재)는 집에 들어온 아빠들의 육아체험기다. 같은 해지만 ‘어디 가’는 1월에, ‘슈돌’은 11월에 시작했다. 모방, 표절 시비가 잠깐 있긴 했다. 그러나 방송에선 꿩(시청률) 잡는 게 매(승자)다. 늦게 시작했어도 오래 살아남으면 승부가 무색해진다. 이를테면 ‘어디 가’에도 민국(김성주 아들)이 있었고 ‘슈돌’에도 민국(송일국 아들)이 있었다. 제작진으로서는 시청자의 기억에 남아있는 민국이가 고마울 뿐이다.

방송인 샘 해밍턴(왼쪽 위 사진 가운데)이 아들 윌리엄 및 벤틀리와 함께 지난 24일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한 모습. 해밍턴 집을 찾아온 방송인 에바와 리에, 리에의 딸 예나(오른쪽 아래 사진 오른쪽부터)와 에바의 아들 노아(가운데 왼쪽 사진). KBS 제공

부자 예능에서 빛나는 건 역시 동심이다. 그 마음은 엉뚱해서 재미있고 순수해서 유익하다. ‘못된 송아지’ 다음에 나올 말은. 아이가 이끌어낸 답은 ‘엉덩이에 뿔 난다’가 아니라 ‘혼난다’였다. 가르친다는 건 어쩌면 창의력을 죽이는 일인지 모른다. 어린이 세계의 권선징악을 여과 없이 보여준 이 일화는 이경규의 ‘전파견문록’(MBC 1999-2005)에 나왔다. 이 프로가 환생한 ‘환상의 짝꿍-사랑의 교실’(MBC 2007-2010)에선 이경규의 딸 예림이도 한몫했다.

역시 이경규가 진행한 ‘스타주니어쇼 붕어빵’(SBS 2009-2015)에선 스타와 자녀들이 동반 출연해 토크와 게임을 펼쳤다. 동현이가 아빠(김구라)의 외모를 닮아가는 걸 보며 시청자들은 한편으로 흐뭇하고 한편으론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것, 그리고 뿌린 대로 거둔다는 사실에 공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농부가 뿌리기만 하고 모내기, 김매기를 때맞춰 하지 않으면 씨앗은 상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자녀 예능의 교훈은 그런 데서도 찾을 수 있다.

‘붕어빵’보다 자녀 연령대를 조금 높인 게 ‘유자식 상팔자’(JTBC 2013-2016)였는데 사실 그 전신은 ‘대한민국 교육위원회’(2013)였다. 지금 각종 교육위원회는 어떤 일에 골몰하고 있을까. 혹시 규제와 조종이 창의와 개성을 가로막는 건 아닐까. 제목과 수명을 한 줄에 놓고 보니 ‘생명 연장의 꿈’은 프로그램 안팎에 두루 존재한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예능에 ‘우결’(우리 결혼했어요)이 있었다면 시사교양엔 10년(SBS 2006-2015)이나 방송된 ‘우달’(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이 있었다.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채널A)나 ‘미운 우리새끼’(SBS)를 보라. 사랑하는 것과 자랑하는 것은 다르다. 선망의 대상이 되기보다 희망의 사례가 되는 게 행복이라는 걸 어른들은 종종 놓치고 있다.

방송사에 들어가 처음 맡은 게 어린이프로그램 ‘모여라 꿈동산’이었다. 사람과 인형이 함께 나오는 프로였는데 시간이 한참 흐른 후 어른이 된 ‘당시의 어린이’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어린 시절이 그에게 득이 됐을까, 아니면 독이 됐을까. 인형처럼 키워지는 아이에게 미래는 없다. 인형은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부자예능 역시 시대를 반영한다. 1인 가구가 늘면서 ‘나 혼자 산다’가 떴듯이 육아 휴직하는 아빠들이 늘면서 ‘슈돌’도 떴다. 그런데 이따금 의심이 간다. 촬영할 때 엄마는 진짜 집에 없을까. 인기를 얻기 위해, 출연료를 받기 위해 일부라도 연기를 하는 거라면 자녀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스튜디오건 야외건 집이건 카메라를 의식하는 순간 리얼리티예능은 엉성한 학예회나 페이크다큐가 된다. 미리 짜고 하는 건지 자연스러운 건지는 PD나 출연자보다 시청자가 더 잘 안다. 기자는 사실(Fact) 여부를 점검하지만 시청자는 진실(Truth) 여부를 감지한다. 부자 예능의 성공 여부는 진심의 유무에 달렸다.

주철환 프로듀서 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