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라떼가 그리울 때

입력 2021-02-04 03:03

새해가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시간은 무심한 듯 흘러도 사람마다 그 맺고 끊음의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학교는 졸업생을 보내고 신입생을 맞이하는 시기다. 가끔 졸업생들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 상담을 요청한다. 설렘도 있겠지만 불안한 현실 앞에 막막함을 더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상담할 때마다 학생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기 일쑤다. 뭔가 좋은 말을 해야만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다 마음의 경계태세가 어느 순간 무너진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입 밖으로 뛰쳐나오는 한 마디. “제가 졸업을 앞뒀을 때는 말이죠.”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화끈거리는 얼굴과 자괴감에 흐물흐물해진 정신을 갖고 남은 대화를 조심스레 이어갈 수밖에 없다.

2년 전이었던 것 같다. 기성세대가 사회초년생에게 조언이나 충고할 때 쓰던 ‘나 때는 말이야’를 패러디한 ‘라떼는 말이야’라는 유행어가 등장했다. 입에 착 달라붙는 어감도 좋거니와 껄끄러운 잔소리마저 부드럽고 맛난 음료로 풍자한 솜씨도 일품이었다. 특별히 기성세대에게는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던 것 같다.

여기서 억울해하거나 당황할 사람도 분명 있으리라. 좋은 뜻으로 학생이나 부하 직원에게 인생 경험을 나눠주려는데, 싸잡아 ‘꼰대’ 취급하다니…. 내 젊음을 희생하고 열심히 일해 우리 사회가 이만큼 왔는데 이 정도 말도 못 한단 말인가.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인류 역사에서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자양분 삼지 않은 세대가 어디 있던가.

물론 기성세대의 진정성 어린 조언은 존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들의 희생과 업적이 폄하되거나 조롱당하는 것은 개인의 관계나 공동체 화합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라떼는 말이야’가 자칫 유사 방어기제처럼 사용되기 쉽다는 점은 잊지 말았으면 한다. 상대의 목소리를 경청하기 싫거나 당면한 문제의 본질을 회피할 때, 손쉽게 권위를 인정받으려 하거나 ‘너 마음에 안 들어’를 고상하게 표현하고 싶을 때 ‘라떼는 말이야’가 등장하곤 한다. 커피 원액의 강렬한 쓴맛을 고소하고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가리듯, 공감이 요구되는 상황을 ‘라떼는 말이야’라는 자기위안적 말 한 마디로 덮어버리지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성서를 읽어보면 ‘라떼’의 언어가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불평할 때마다 모세는 흥분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고생했을 때는 말이야’라고 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려 노력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자신의 권위를 보이고자 ‘내가 아버지께서 세상을 창조했을 때 있어봐서 아는데 말이야’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이 땅의 가난한 자와 눈먼 자, 포로된 자에게 하나님 은혜의 해를 선포했다.

하나님 말씀을 받았던 모세, 하나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믿음의 내용만이 아니라 신앙인의 언어에 대해서도 중요한 뭔가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상처 난 공동체와 개인의 삶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건 과거의 성취를 가리키는 ‘라떼는 말이야’가 아니라 나보다 더 큰 세계, 즉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와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타자의 삶을 투명하게 보여줄 진솔한 언어가 아닐까.

라떼를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맞대며 대화를 나누던 일상의 회복을 몹시 그리는 이때, ‘라떼는 말이야’ 대신 상대의 삶에 진정성 있게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보면 어떨까. 서로의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대화와 소통의 공간을 열어주며, 타인을 따스하게 환대하는 촉매로서 라떼의 명예회복을 촉구한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