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아이들은 가방만 던져두고 나가 땀범벅이 될 때까지 뛰어놀던 시절이 있었다. 놀다 보면 배가 고파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지만 저녁을 먹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 그때 아이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만화영화와 어린이 연속극이었다. 엄마는 빨리 씻고 숙제부터 하라고 성화셨지만 12인치 흑백 텔레비전의 유혹은 강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컬러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온 세상은 총천연색으로 바뀌었다. 배우들의 의상은 어색해 보였고 얼굴은 분장한 티가 확연했지만 흑백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난는 것만으로도 텔레비전을 즐길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 오색의 바람을 타고 기획된 어린이 연속극이 MBC ‘호랑이 선생님’(1981~1986)이었다.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라 불리던 시절, 5학년 5반 아이들과 허봉수 선생님(조경환)의 일상을 그린 호랑이 선생님은 20분물로 제작된 시츄에이션 드라마로 국내 최초의 교육 현장 드라마였고 5년 8개월 동안 1300여회를 방송한 최장수 어린이 일일 연속극이었다.
아이들 성장기이자 선생님 교사일지
‘호랑이 선생님’은 학교를 중심으로 아이들과 선생님, 그리고 학부모들이 당면한 문제들을 사실적이고 밀도 있게 그려냄으로써 ‘어린이 문제극’이라 불리기도 했다.
민주 선거의 중요성을 보여준 ‘반장 투표’, 아이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계급 의식을 다룬 ‘졸병과 대장’, 빈부격차의 문제를 지적한 ‘생일 선물’, 생명의 존엄성을 알려준 ‘병아리’, 도시 아이들의 현실을 보여준 ‘아파트 아이’, 소아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문제를 다룬 ‘두 아이’,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를 조명한 ‘떠돌이 별’, 성적에 대한 고민 탓에 잘못된 선택을 했던 ‘시험지 훔치기’ 등 교육적 목적을 뚜렷이 보여주면서도 현실 밀착적으로 그려진 이야기는 시청자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이혼 가정 아이들의 고민, 선생님의 체벌, 엄마들의 치맛바람, 학교 폭력, 자연보호, 물자 절약, 위생과 건강, 심지어 촉법소년 문제까지 아이들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소재가 되었다.
학교에서조차 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쑥스러워했던 성(性)에 관한 이야기도 과감히 담아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 가진 성에 대한 호기심을 풀어주고 무지에서 오는 10대들의 성범죄를 예방한다는 취지로 방송된 ‘꽃과 나비’는 이후 일선 학교에서 성교육 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당시 사회 일각에서는 이런 문제까지 어린이 연속극에서 다루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TV 최초의 어린이 대상 성교육 방송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아이들의 모험심과 상상력을 키워주기 위한 이야기도 자주 등장했다. 1984년 겨울 방학 특집으로 방송된 ‘미래의 교실’은 당시로는 아주 먼 미래였던 2000년의 일상을 그린 상상극이었다. 아이들 공부방에서 책은 찾아볼 수 없었고 모든 수업은 컴퓨터를 통해 이루어졌다. 화상통화는 기본이고 자동화 시스템은 일상을 바꿔 놓았다. 심지어 보기만 해도 침샘을 자극하는 음식들은 알약이나 주스 한 잔으로 대체되었는데, 이제 와 보면 어떤 것은 현실이 되었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했지만 미래는 그렇게 아이들이 꾸는 꿈을 통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호랑이 선생님’은 방학 때 별도 주제를 선정하여 특집 방송을 했다. 국토 순례나 문화제 탐험, 산업시설 견학 등 교실을 벗어나 다양한 체험을 했고, 시츄에이션 중심의 사실 극과 달리 모험극, 역사극, 뮤지컬, 공상 과학 극, 스포츠 극 등 다양한 형태의 드라마를 시도하기도 했는데 아역 배우들에게는 다양한 장르의 연기를 경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수업이 되기도 했다.
호랑이 선생님은 노총각이었다. 교감 선생님 댁에서 하숙을 하기도 했던 그는 커다란 체구와 큰 목소리 때문에 무서워 보였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했다. 편견과 차별 없이 아이들을 대하려고 노력하는 그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게는 스스로 뉘우칠 수 있도록 호되게 대했지만 응원과 위로가 필요한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공부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들이 되어주길 바랬던 이상적인 선생님이었다.
청소년 드라마 ‘학교’가 신인들의 등용문이었던 것처럼 ‘호랑이 선생님’도 아역배우들의 등용문이었다. 성인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윤유선, 이연수, 김진만, 이상아, 강문희 등을 비롯해서 지금은 활동하고 있지 않지만 당대 어린이 배우로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신민경, 천동석, 황치훈, 이재학, 김지훈 등 수많은 배우가 ‘호랑이 선생님’ 반 아이들이었다. 특별 출연진도 화려했다. 대중 스타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TV 시대 아이들’에는 당시 최고 인기 스타였던 조용필이 출연하여 화제가 되었고, 야구와 관련된 이야기 편에서는 최동원 선수가, 과학주간에 방송되었던 ‘미래의 충격’에는 물리학자인 김정흠 교수가 출연하는 등 인기 연예인이나 주제와 연관된 전문가들이 직접 출연해서 색다른 재미를 주기도 했다.
‘호랑이 선생님’은 민주적인 분위기의 학교와 대화가 살아있는 교육 현장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해 현직 교사 6명과 시교육 장학사 1명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단을 운영했다. 드라마가 때로는 실제 학교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자문위원회는 학교가 아이들의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곳이 되길 희망하는 마음을 객관적으로 담아낼 수 있도록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자문위원단의 의견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들도 화려했다. 시작은 ‘수사반장’ ‘한 지붕 세 가족’ 등을 집필한 이홍구 작가였고 이후 ‘옛날의 금잔디’ ‘은실이’ ‘당신이 그리워질 때’ 등의 이금림 작가를 비롯한 다수의 작가가 참여했다.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의 송지나 작가는 ‘호랑이 선생님’이 데뷔작이었고, 만화가 강철수도 처음으로 드라마를 집필해 화제가 되었다.
드라마 시간과 실제 시간이 동일하게 진행된 ‘호랑이 선생님’은 5학년 아이들이 6학년이 되고 졸업할 때까지 학교 안팎의 일상을 담아낸 아이들의 성장기이자 선생님의 교사일지였다.
어린이 드라마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어린이 드라마를 ‘초등학교 졸업연령인 14세 이하 아이들을 주 시청층으로 하는 드라마’라 정의한다면 이제 TV에서 어린이 드라마를 찾아보긴 쉽지 않다. MBC는 1991년 ‘동요나라’, KBS는 2014년 ‘마법천자문’, EBS는 2016년 ‘갤럭시 안전 프로젝트’를 끝으로 어린이 드라마를 제작, 방송하지 않고 있다. 현재 어린이 채널인 투니버스가 키즈 크리에이터들의 생활을 그린 ‘조아서 구독중’을 제작, 방송하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어린이 드라마들은 어디로 갔을까?
기록상 TV 어린이 드라마의 시작은 1976년 MBC에서 방송된 ‘어린이 명화극장-엄마를 찾아서’이다. 당시 정부는 방송사 간 과열 경쟁 규제라는 명분으로 방송 프로그램 정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가족 시청 시간대를 신설했다. 오후 6시부터 9시 30분까지 연예오락 프로그램 편성을 금지했고 시간대별로 세분하여 6시는 어린이 시간대, 7시는 가족 시간대, 8시 이후에는 국난 극복 및 민족정기를 담은 드라마와 교양 프로그램을 편성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각 방송사는 매일 1시간을 채울 어린이 프로그램이 필요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입 만화영화, 인형극, 동요 프로그램과 함께 어린이 연속극을 제작하기로 했다. 그것이 ‘엄마를 찾아서’였다. 정부 정책 수행의 일환이었지만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인간의 삶을 조명하며 꿈과 희망을 키운 이 드라마는 ‘똘똘이의 모험’ ‘달려라 삼총사’ ‘X 수색대’ ‘오성과 한음’ 등으로 이어졌고, 어린이 드라마도 정착되어 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며 방과 후 학원 학습 증가로 TV 시청시간이 감소하고 케이블 출범과 함께 어린이 전문 채널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게 되면서 어린이 연속극의 인기는 사그라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드라마가 없는 시대, 교육과 오락을 겸비한 어린이 드라마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경제성이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