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주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는 불신자였고 어머니는 교회 집사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단지 친구와 친한 형들이 있는 놀이터일 뿐이었습니다. 대학 진학 후 제 신앙의 바닥은 자연스럽게 드러났습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벌을 받거나 사고를 당할 것 같아 ‘보험’ 성격으로 출석만 했습니다. 이곳저곳 분위기 좋은 교회를 찾아다니며 이벤트가 있거나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메뚜기’ 성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성도들을 보면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열심히 봉사할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극적인 치유를 받거나 돌아온 탕자 같은 삶을 경험한 사람의 간증을 들으면 ‘나는 왜 저런 반전이 없지’라며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교회를 섬길 기회가 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피했습니다.
그렇게 이중적인 종교 생활을 하다가 2013년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를 통해 예수마을셀교회에 오게 됐습니다. 교회 성도들의 따뜻한 섬김과 권면으로 2014년 제25차 행복치유수양회에 참석했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더이상 평범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특별한 인생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율법적으로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 같은 추악한 죄인을 끝까지 인내하시며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 그분의 ‘크레이지 러브’(미친 사랑)가 제 삶을 특별하게 만들었습니다.
제자훈련을 받으며 복음의 열정이 솟아났지만, 전도에는 항상 한계가 있었습니다. 직장 동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친구 가족에게 복음을 전해도 실제적인 열매가 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한계에 다다를 즈음, 코로나19 사태가 터졌습니다. 노방 전도와 교회의 모든 행사가 멈췄습니다. 하지만 박영 담임목사님은 ‘이것이 오히려 제자를 삼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권면대로 실제적인 열매를 맺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셀 제자양육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양육을 하는 자가 가장 큰 감격 있다’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양육 대상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기도를 작정해 리스트를 적어가며 기도했습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지인을 찾아갔고 용기를 내서 셀 제자양육을 했습니다. 그렇게 매주 양육을 하면서 오히려 제가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을 맛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그동안 목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제자양육의 기쁨이구나.’ 깊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양육대상자가 7주간의 기초 과정을 마치고 교회 예배까지 출석하는 기쁨을 맛봤습니다.
셀 제자양육 기간 중 아내의 둘째 아이 유산과 여러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양육을 하며 나같이 평범한 사람도 특별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기에 매주 눈물로 기도하며 진행했습니다.
저의 변화되는 모습에 아내도 감동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인생의 주인 자리에서 내려오니 자연스럽게 주변의 많은 갈등이 사라졌습니다. 점점 믿음의 가정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아무런 목표도 없이 살던 인생에게 제자 삼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치열한 직장 생활 중에도 매주 10명을 양육해야겠다고 다짐하니 뜻하지 않는 곳에서 양육 대상자를 발견합니다. 지금도 셀 제자양육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영적으로 마지막 시대라고 말합니다. 저는 주님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수많은 제자를 세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주님을 다시 만날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고 금 면류관 받는 영광스러운 제자가 되겠습니다.
주민철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