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헬로 스트레인저

입력 2020-09-11 04:03

몇 년 전 외국의 한 지방 도시에서 밤늦게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숙소에 다다랐을 때 일행 중 한 명이 내릴 준비를 하다가 택시 시트에 생수를 조금 흘렸다. 물 자국을 본 기사는 별안간 아무도 내리지 말라며 소리를 질렀다. 체류 내내 소곤거리듯 말하는 지역 분위기에 적응 중이던 터라, 나뿐 아니라 일행 모두 깜짝 놀라 당황했다. 물이니 곧 마를 거라 설명하며 아무리 사과해도 기사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화난 억양의 현지어를 다 알아듣기는 어려웠으나 현지 물가로는 상당한 금액을 요구하는 것 같아 아무래도 기사가 사소한 꼬투리로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것으로 일행은 판단했다.

그러던 중 숙소 직원 몇 명이 소란을 듣고 나왔다.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경찰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는데, 택시 기사가 숙소 직원과 몇 마디 나누더니 곧 차분해지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어두운 밤이라 흘린 게 음료수라고 생각한데다가 화장실이 급했던 일행 중 한 명이 도착하자마자 먼저 내리려는 것을 보고 도망가는 줄 알았단다. 직원 보기에는 우리가 들고 있던 생수병 로고가 설탕이 많이 든 그 지역 음료수병과 비슷해 오해한 듯한데, 회사 차량이라 나중에 문제가 생길까봐 더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다며 우릴 안심시켜 주었다. 그렇게 그날은 직원의 통역 덕에 오해가 풀리면서 세탁비와 적절한 보상액을 지불하는 것으로 잘 수습이 됐다.

하지만 그 이후 언어가 의사소통에 얼마나 불완전한 도구인지를 종종 곱씹게 된다. 그때는 언어 차이가 오해의 원인이었지만, 같은 말을 써도 사실 우리는 세대나 성별, 직위 또는 저마다 입장에 따라 남의 말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기만의 필터로 걸러 듣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상호 간 최소한의 노력 없이는, 결국 우린 소통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맴돈다.

배승민 의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