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김정은의 ‘다운시프팅’

입력 2020-08-31 04:01

어느 나라든, 정치 문화가 어떻든 최고지도자들은 상당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 같다. 2009년 취임 당시 청년다운 패기가 넘쳤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단 8년 만에 깊은 주름살이 패고 백발이 성성한 노안(老顔)이 됐다. 한때 4선 집권까지 노리며 기세등등했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도쿄올림픽이 연기되고 코로나19 대응 실패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급격히 건강이 악화돼 총리직을 포기해야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예외는 아니다. 그가 극심한 통치 스트레스를 겪는다는 건 정보 당국 평가 없이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일인 독재 체제의 최고지도자로서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은 단견이다. 모르긴 몰라도 김 위원장은 일반인은 상상도 못 할 극도의 압박과 긴장 속에서 국정을 운영하고 있을 테다. 9년 전 앳된 청년티가 역력했던 그가 울긋불긋 얼룩진 피부에 초고도 비만 체형이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김 위원장을 가장 괴롭히는 건 아마도 고독감일 듯싶다. 화려한 제복을 차려입은 간부들이 주변에 잔뜩 도열해 있어도 최종 결단의 부담을 질 사람은 오로지 김 위원장뿐이다. 작은 실수로도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간부들은 사소한 결정 하나 내리지 못하고 김 위원장 입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결국 김 위원장이 직접 시시콜콜한 사안까지 일일이 보고 받고 검토하고 결재를 할 수밖에 없다. 이것만으로도 무척 피곤한 일이다.

김 위원장을 향하는 주민들의 시선도 부담스럽다. 주민들이 남들 보는 데서는 ‘경애하는 원수님’ ‘위대한 영도자’라고 치켜세워도 속으로는 자신을 힐난하고 있음을 김 위원장 자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김 위원장은 집권 직후 “다시는 인민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지 않겠다”고 주민들에게 공언했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완화될 기미조차 없는데 코로나19에 수해까지 겹쳤으니 그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최근 김 위원장은 9년 동안 쌓인 스트레스에 지쳐 ‘다운시프트’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은 지난 4월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 생일 참배도 하지 않고 20일간 잠적해 국내외에서 갖가지 추측이 쏟아져 나왔다. 한때 사망설까지 나왔지만 지금으로선 김 위원장이 강원도 원산의 휴양지에서 휴식을 취했을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그가 이 기간 원산에서 승마를 즐기고 제트스키를 탔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김 위원장이 이른바 ‘위임 통치’를 하고 있다는 국가정보원 분석도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김 위원장의 후계자라거나 북한 체제의 이인자가 됐다는 식의 해석은 지나치다. 김 위원장에게 쏠리는 과도한 업무를 분산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고위 간부들에게 전결권을 부여하는 식으로 통치 체계를 조정했다고 보는 쪽이 더 타당하다. 국정원이 ‘위임 통치’라는 말을 쓴 것부터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따라서 권한을 분산하더라도 김 위원장이 짊어진 통치 부담의 무게에는 큰 변화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집권 초기 노골적으로 체제 이인자를 표방했던 고모부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을 자기 손으로 숙청했던 인물이다. 특정 간부에게 권력의 본질적인 부분을 나눠줄 경우 곧바로 강력한 경쟁자로 대두할 것임을 김 위원장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바꿔 말하면 여전히 김 위원장 본인이 국정 대소사를 관장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결국 김 위원장이 권좌에 앉은 내내 극심한 스트레스가 그를 괴롭힐 것이다. 임기가 끝나면 긴 휴식이 주어지는 민주국가의 지도자들과 달리 그에게 통치 스트레스란 숙명과도 같다. 선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례에서 보듯, 죽어서야 벗어날 수 있는 굴레를 짊어진 셈이다. 이런 김 위원장을 보고 있으면 그의 화려한 삶이 부럽기는커녕 도리어 측은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조성은 온라인뉴스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