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입력 2020-07-20 04:02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고 대통령은 임금이 아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을 태종·세종에 빗대며 왕처럼 떠받들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두둔하려 이순신 장군을 들먹이는 것을 보면 조선이라는 전근대 사회를 좋아하는 21세기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꽤 많은 것 같다. 이에 대한 반발심이 생겨 조선의 멸망을 다룬 책을 꺼내들었다. 중국의 근대 사상가이자 정치가 량치차오(1873~1929)가 조선에 관해 쓴 글을 엮은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라는 책이다. 여기에 나오는 주옥같은 표현들을 혼자 알기 아까워 옮겨본다. 이것은 단지 현재의 한국을 조선과 혼동하거나 전근대적 마인드를 여태껏 갖고 있는 사람들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일 뿐임을 미리 밝혀 둔다.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은 궁정에 있다. 실로 한황(고종)이 망하게 한 것이다. 사리판단에 어두우며, 총애하는 궁녀가 많고 도적놈들이나 가까이하며, 잔꾀를 부리고 계획은 늘 치졸하며, 허식을 좋아하고 내실에 힘쓰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잇단 성범죄(총애하는 궁녀)와 여권 인사들이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는 금융사기(도적놈들)가 생각난다. 문 대통령은 지난 16일 국회 개원 연설에서 지금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박 전 시장 사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미국 CNN방송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던 문 대통령이 성범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고 보도했다.

“양반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모두 높이 받들어지고 넉넉한 곳에 처하며, 교만하고 방탕하여 일하지 않고, 오직 벼슬하는 것을 유일한 직업으로 삼았다. 한번 높아지면 시중드는 하인이 구름같이 많아진다.” 집값 급등으로 재산을 크게 불린 고위 공직자들(넉넉한 곳에 처하며),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휴가 여행에까지 같이 휴가를 내고 동행하는 공무원들(시중드는 하인)이 떠오른다. 추 장관은 휴가 관련 보도가 나온 날 “개혁을 바라는 민주시민에 맞서 검찰과 언론이 반개혁 동맹전선을 형성하고 있다”고 언론을 비난했다.

“조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관념이 매우 박약하다. 벼슬하는 사람들 또한 그러하다. 오늘 벼슬을 하고 권세가 있으면 내일 나라가 망하더라도 상관할 바가 아니다.” 지금 여권은 주어진 권력으로 어떤 가치를 이루려 하는지 모르겠고, 오로지 권력만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응당 추구해야 할 국리민복을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압도적인 국회 의석과 너무나 열성적인 지지층, 계속 지리멸렬해서 정권에 경각심을 못 주는 야당이 그런 노력의 필요성을 없애는 측면도 있다.

“안중근 같은 이가 한둘쯤 없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에서 중시되지 않는다. 음험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늘 번성하는 처지에 놓였고, 정결하고 자애하는 자는 쇠멸하는 처지에 놓였다.”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잊고 뻔뻔해져만 간다. 박 전 시장 사건을 놓고도 피해자의 외침을 부정하고 피해자를 공격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우리 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정상적인 사고를 저해하고 있다. “조선 정치의 문란함은 다스릴 수도 없고, 썩어 문드러져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386세대 작가 김규항은 최근 SNS에 “내 세대의 악취는 스스로 썩어 만들어졌다. 2020년 한국은 도처에 진동하는 386의 악취로 숨쉬기 어렵다”고 적었다.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조선이지 일본이 아니다. 그런데도 조선 사람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량치차오의 탄식이 지금도 어디선가 들리는 듯하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