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양계장의 닭들은 멍할 거야

입력 2020-04-24 04:03

“양계장의 닭들은 멍할 거야. X같다고 느낄 거야. 너무 바보같이 살아서 자기가 알인지 닭인지 모를 거야.” 장정일의 소설 ‘보트 하우스’ 도입부는 이렇듯 파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소설을 읽은 건 대학 2학년이던 2000년, 그러니까 딱 20년 전이었다. 스무 살 시절엔 별것 아닌 문구도 대단하게 느껴졌기에 작품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으며 소설가의 삶을 상상하고 조금은 동경하기도 했었다.

“새벽 3시. 밤새도록 불을 켜놓은 닭장에서 알을 낳으려고 끙끙거리는 닭처럼 나는 눈을 말똥거리고 있다. 제길, 항문으로 말이야. 어쩌다 잘못하면 피똥을 싸게 되는 줄도 모르면서 밤새 무엇을 쓰겠다고 작심하고 책상 앞에 앉은 꼴이라니.”

‘보트 하우스’의 줄거리는 머릿속에서 가뭇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양계장의 닭들은 멍할 거야”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뇌리에 남아 있다. 장정일은 지난해 7월 신작 시집을 28년 만에 발표했는데, 여기에도 ‘보트 하우스’ 첫머리를 변주한 작품이 등장한다. “자정이면 멍해질 거야. 양계장의 닭들은 너무 바보같이 살아서 자기가 알인지도 닭인지도 모를 거야.”(‘양계장 힙합’)

지난해 장정일의 시집을 읽은 뒤부터 틈틈이 과거 그가 발표한 책이나 칼럼을 다시 찾아 읽게 됐다. 그가 내놓은 정치 논평엔 동의하기 힘들 때가 있지만, 대체로 그의 글이 품은 가지런한 논리에 감탄하곤 한다. 무엇보다 그의 글에 이끌리는 이유는 주장이 선명해서다. 알려졌다시피 장정일은 중용이니 균형이니 하는 가치를 껄끄럽게 여기는 지식인이다. 그는 2006년 출간된 ‘장정일의 공부’에 평소 존경받던 원로가 실망스러운 발언을 할 때는 십중팔구 “잘못된 중용”을 취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글을 덧붙여놓았다.

“나는 언제나 ‘중용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언젠가부터 언론을 향해 날아드는 간단없는 비판은 ‘기레기’ 같은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언론이 중간자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인데 사람들은 언론이 표방하는 ‘중용’ ‘균형’ ‘중도’ 같은 슬로건에 코웃음을 친다. 어떤 기사를 쓰든 악플이 수두룩하게 달릴 때가 많다.

언론이 조롱의 타깃이 돼버린 이유 중 하나는 시민들이 언론 보도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발견하기보다는, 희미하게 묻어나는 무지의 흔적부터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무지’를 ‘중용’이라고 우기니 많은 이에게 기자는 “자기가 알인지 닭인지” 모르는 “양계장의 닭들”로 보일 수밖에. 물론 기자들에게도 변명거리는 많다. 공부와 고민 끝에 기사를 내놓고 싶지만 그렇게 하기엔 무엇보다 시간이 부족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새로운 저널리즘은 난망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출판계 사람들을 만나면 종이책의 ‘미래’를 걱정하는 말부터 건네곤 한다. “요즘 힘들지 않나요” “왜 이렇게 책을 안 읽을까요” “언제쯤 출판 시장이 괜찮아질까요”…. 한데 그들 답변은 이런 식으로 돌아올 때가 많다. “그래도 종이책이 종이신문보다는 사정이 낫지 않을까요.” 실제로 신문은 망해도 책은 살아남을 것이다. 책은 신문보다 치열한 사유의 결과일 때가 많으니까, 무지를 중용으로 포장하는 경우는 드무니까. 바꿔 말하면, 책이 품은 깊이를 좇는 일이 신문이 살아남을 방법일 수도 있을 듯하다.

박지훈 문화스포츠레저부 차장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