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16세기 종교개혁이 당시의 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것처럼 이 시대의 교회개혁도 교회 안팎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때의 종교개혁이 타락한 중세를 끝내고 문명의 근대를 열었듯이 지금의 교회도 교회 안팎의 부패를 척결하고 윤리와 도덕을 회복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실천해 새로운 세계를 열자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신기루에 근거한 우물 찾기와 같습니다. 종교개혁으로 인한 세상의 긍정적 변화는 신학과 교리의 회복에 의한 열매였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심지 않고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처럼 종교개혁의 본질적 뿌리가 자라기 전까지 종교개혁의 참된 열매는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개혁의 초점은 뿌리의 회복에 있었고 그 뿌리는 신학과 교리였습니다.
루터의 95개 조항은 교회나 사회를 바꾸자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기능이나 역할을 변화시키자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교황의 황당한 권세 중 무척이나 많은 부분을 인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마음은 먼저 교회나 사회의 변화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신앙 본질의 회복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지위에 관한 것’이었고 ‘구원방법에 관한 것’이었고 ‘성도의 가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이 3가지의 두드러진 변화를 교회에 가져왔고 그것이 교회와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동인이 됐습니다. 그중 ‘성도 가치의 회복’을 역사는 ‘만인 제사장’ 혹은 ‘만인사제주의’(Universal priesthood of believers)라고 부릅니다.
그동안 교회는 교황(사제)과 일반 교인은 질이 다른 존재라고 가르쳤습니다. 일명 사제주의(Sacerdotalism)입니다. 이는 사제만이 하나님과 일반 교인 사이의 중재자이고 오직 그들만이 성도 개인의 영혼을 책임지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것입니다. 이 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일반 교인들의 영적 생사나 구원의 박탈이 달려있는 게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개혁자들이 그 사상은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며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움 받은 중재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고 마리아나 성자나 교황(사제)도 결코 중재자가 될 수 없다는 게 성경의 주장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요 제사장이라고 외쳤습니다. 바로 ‘만인제사장’ 교리였습니다. 이 교리가 중세사회의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
이 교리를 선언한 후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사제들이 행하는 일만이 아니라 각 성도가 일상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높이며 살아가는 모든 일이 가치 있는 성직(聖職)이 됐습니다. 이 교리는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 학교 사회 경제 등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로 이끌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이처럼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 성경에 근거한 구원의 확신 그리고 거기에서 기인한 만인제사장 교리로 세상을 바꾼 역사입니다. 종교개혁의 열매는 이것에 대한 믿음이 신앙과 삶에 맺힌 결과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고한 고백이 없고 ‘이신칭의’로 얻는 구원의 확신도 희미하며 나아가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 됐다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결여된 교회나 사람에게 교회개혁이나 그로 인해 변화된 성도의 삶을 요구하는 것은 종교개혁을 왜곡하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런 분명한 신앙고백이 없이도 맺힐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지난 정권들에서 보아온 각종 운동이나 정신개조 캠페인 등에서 만들어진 사상이나 결과물 같은 것일 수는 있겠으나 교회개혁의 열매일 수는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신앙고백이 결여된 교회나 성도에게 16세기 종교개혁의 열매나 그로부터 발생하는 각종 윤리와 도덕적 삶을 요구하는 것은 뿌리가 없는 나무에 열매를 맺으라고 호통치는 것과 같은 허망한 보챔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바른 교회개혁은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의 가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의 고백을 하게 하는 것이요,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고 누리게 하는 것이요, 그것에 근거해 자신이 이 땅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부여받은 하나님의 대사요 자녀라는 소명의식으로 살아가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거기서 맺히는 것이 비록 작더라도 참된 교회개혁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종교개혁의 진실은, 루터를 비롯한 소수의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된 이런 본질의 회복이 교회와 사회를 바꾸는 태풍이 된 역사였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