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급할수록 본질로 돌아가라!

입력 2020-01-07 19:10 수정 2020-01-07 20:30

흔히 미국의 3대 피자를 꼽자면, 다양한 메뉴로 무장한 ‘피자헛’, 빠른 배송으로 승부를 건 ‘도미노’, 그리고 ‘파파존스’를 꼽는다고 한다. 특히 파파존스는 이중 제일 후발 업체였다. 아시다시피 사람의 입맛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펩시콜라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코카콜라를 따라 잡을수 없는 것이다. 파파존스는 치열한 피자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전략을 하나 세웠다. 피자도 음식이다. 음식이라면 맛있어야 한다. 맛이 있고난 다음에야 친절이나 다양한 메뉴도 필요한 것이라고 전략을 세웠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피자를 만들자고 전략을 세웠다. 이 전략이 통했다. 그리고 파파존스는 메뉴도 다양하지 않고, 배송도 빠르지 않지만 맛있는 피자로 입소문이 나면서,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것을 흔히, ‘본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착함인가? 복을 받는 것인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떨치는 것인가? 우리 신앙의 본질, 교회의 본질은 바로, ‘십자가’이다.

초대교회는 건물도, 신학교도, 재정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이 어렵다고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와는 비교할수 없는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실제적인 핍박, 세상의 조롱, 아직 정립되지 않은 신학들로 인한 이단의 득세 등 거센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오직 하나만 갖고 있었다. 그것은 오직 예수요, 오직 십자가였다.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오늘의 현실은 너무 많은 것들을 알고, 너무 많은 행사들을 진행하기에 문제가 된다. 그 사이에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가? 현시대가 급하고, 위중한 상황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공감한다. 오히려 부흥하는 교회,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를 보면 이상하고 신기한 현상으로 여길 정도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는데, 급할수록 허둥지둥하다가 아무것도 못하지 말고, 한 가지만 붙잡기를 원한다. 성도들이 은혜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목사님들은 일꾼이 없고,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무리 없어도 한 사람은 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모일 수 있는 집회 장소는 준비되어 있지 않는가? 거기에서 십자가를 전하고 일어서면 된다. 안되더라도 십자가를 외쳤으면 그것은 패배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 하라고 우릴 부르셨으니까.

초대교회 그 어려운 시절도 십자가를 전하면 살아났다. 십자가를 붙들면 회복되었다. 십자가를 외치면 성령이 임하셨다.

십자가의 가치를 모르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십자가를 안 들어본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십자가를 한 번도 전하지 않은 설교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성도는 찾아보기 힘들고, 십자가의 본이 되는 설교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십자가를 듣고, 말하나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흔히 십자가를 고생이라고 생각한다. 평생 풀리지 않는 숙제라고 여긴다. 십자가는 고생이 아니다. 십자가는 곧 죽음이다. 오늘날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고생하라는 의미로 들리지만, 초대교회에서 전한 원시복음에서는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하는 자도 듣는 자도 십자가를 죽음이라고 이해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죽음을 향한 걸음으로 각오하고 따랐다.

과거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 가정을 위해 죽어주셨다. 인격으로 죽으시고, 여자로서도 죽으시고, 평등한 삶에서도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 속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교회가 죽으면 세상이 산다. 교회에서 목사가 죽으면 성도가 살고, 성도가 죽으면, 그 이웃들이 살아난다.

결국은 돌고 돌아 본질이다. 답은 먼곳에 있지 않고, 어려운 정상에 있지 않다. 단지, 알지만 행치 않고, 죽지 않고, 바둥바둥 이 악물고, 살고 싶은 내 모습이 문제일 뿐이다.

박한수 목사

◇필자=제자광성교회 담임, 장신대 신학과, 장신대 신대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