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숙 (6) 다섯 남매, 주님 은혜로 모두 원하는 중학교 입학

입력 2019-12-31 00:05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앞줄 오른쪽 두번째)와 가족이 1984년 아버지 생신에 여동생 및 셋째 남동생 가족과 함께한 모습. 큰 오빠와 막내 가족이 이민 간 후엔 두 동생 가족과 함께 부모님 곁을 지켰다.

“주님의 동산 아름다운 산, 우리의 집은 아름답고 좋도다.… 주님이 계신 곳, 평화의 동산.” ‘주님의 동산’이란 이 찬양의 가사는 참 아름답고 영감을 준다. 한 가정을 이끄는 리더십은 부모에게 있다. 외적 리더십과 내적 리더십의 조화는 이 노랫말처럼 가정을 평화롭고 아름다운 동산으로 이끈다.

우리 집은 한국의 전통적 가정 형태를 유지했다. 아버지는 철저히 밖에서 활동했다. 경제권은 아버지께 있었다. 어머니는 살림과 자녀교육에 집중했다. 아버지 성격은 내성적이었지만, 생각이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멋쟁이였다. 일찍이 승마를 즐겼고 클래식 음악에 심취했다. 당시 구하기 힘든 레코드판을 수집해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취미를 즐겼다.

진남포에서 유력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개성의 명문 미션스쿨 졸업생이었다. 신앙 깊은 할머니 손에 키워져 믿음이 깊었다. 인자함과 겸손함으로 주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서 학업과 신앙을 연마한 어머니는 서울 유학을 꿈꿨다. 선교사들의 강력한 추천도 있었고 본인도 서울에서 학업을 계속하길 원했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정직과 신용, 성실로 정확한 일 처리에 탁월함을 보이는 한 청년을 사윗감으로 점찍어 놓고 있었다. 어머니는 졸업 후 유학의 꿈을 접고 결혼해 3남2녀를 얻었다.

수많은 고비마다 구원의 손길을 느끼며 온 가족이 죽음의 피난길에서 살아남았다. 피란 생활을 하던 부산을 거쳐 서울에 안전하게 정착했다. 전쟁 직후 난민 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니의 교육열은 뜨거웠다. 당시는 학원이나 과외란 게 없던 시절이다. 반면 입시경쟁은 치열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어떤 중학교에 입학하느냐가 한 사람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차대한 일로 여겨졌다. 당시는 중고등학교에도 등급이 있었다. 일류 중학교에 들어가면 같은 등급의 고등학교로 거의 진급했다. 대학 진입도 순조로웠다. 이 때문에 중학교 입학이 10대 초반의 어린 학생에겐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우리 집은 주님이 계신 곳, 기도가 있는 동산이었다. 나는 꼭 가고 싶은 학교가 있었다. 어머니도 기도했지만, 나 역시 어린 나이에 하나님께 소원을 아뢨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걸어서 학교로 오가는 길이 내 기도시간이 됐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란 여호수아의 확고한 고백이 우리 어머니 고백이고, 우리 가족 모두의 고백이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다섯 남매는 모두 원하는 중학교에 입학했고 고등학교까지 잘 마쳤다. 전쟁을 겪은 험난한 삶이었고 북한에 모든 것을 두고 온 난민 가정이었으나 우리 다섯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각각 주님이 예비하신 배필을 만나 가정을 이뤘다. 자금 생각해도 이건 기적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한국 사회는 늘 전쟁의 위협을 겪었다. 1970년대 초반이 특히 불안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때 이민의 길을 택했다. 우리 가정에도 이런 변화가 생겼다. 오빠 가족이 브라질 상파울루로, 막냇동생 가족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을 떠났다. 흔히 ‘다섯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고 말하지만, 맏아들과 막내아들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은 각별했다. 갑자기 이산가족이 되는 느낌이 들어 너무 마음이 허전했지만, 부모님은 두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오빠가 떠났으니 내가 맏이 노릇을 제대로 해야 했다. 나는 남편의 지원을 받으며, 둘째 여동생 및 셋째 남동생 내외와 부모님 노년이 복되고 형통하길 기도했다. 아버지는 87년 7월 별세했다. 홀로 된 어머니를 셋째 남동생이 신실한 아내와 함께 극진히 모셨다. 어머니는 2004년 9월 하나님 나라로 떠나셨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