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사회에서 인권이란 말이 회자되지 않던 시절부터 지금껏 아동인권 국제NGO(비정부기구)에서 일했다. 아동인권을 삶과 일터에서 녹여내는 해외 전문가와 함께 일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덕분에 한국에선 흔치 않은 아동인권 촉진자(facilitator)로 인정받았다.
1998년쯤 대학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아동·청소년 복지를 전공하는 대학생이 현장에 나올 때 너무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우려를 평소에 많이 했던지라 흔쾌히 수락했다. 치열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내 강의가 학생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간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며 터득한 교수법인 ‘촉진자 기법’을 활용해 토론과 워크숍 활동을 이끄는 게 신선했던지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당시 강의한 주제는 아동인권과 아동복지, 아동안전, 아동인권과 사회문제 등이다. 산학협력교수로 시작한 대학 강의는 15년 정도 계속했다. 꽤 긴 시간을 대학에 드나들다 보니 교수들과 친분이 생겨 정보도 교환하고 사적인 이야기도 나누게 됐다. 이들은 내가 어떻게 아동인권 전문가가 됐는지를 가장 궁금해 했다. 젊은 유학파 교수도 아니고 박사도 아닌 그저 평범한 활동가인 내가 어떤 계기로 아동인권 전문가가 돼 대학 강의까지 하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활동했을 때는 아동인권이 대중에게 생소했던 시기가 아닌가.
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또 있다. 기자들이다. 어린이날이나 아동권리주간, 유엔아동권리협약 채택일 등 기념일이 다가오면 줄곧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질문 중에는 어떻게 아동인권 전문가가 됐는지, 어떻게 ‘아동인권의 대모’가 됐는지, 무슨 계기로 ‘아동인권 전도사’가 됐는지 등이 꼭 들어있었다.
나는 지금껏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을 준 적이 없다. 나는 아동인권 전문가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더구나 아동인권의 대모도 적절한 호칭이 아니라고 본다. 전도사처럼 아동인권을 열심히 알리고 전하는 사람은 맞는 것 같다. 나는 아동인권을 알리고 아이 편에서 편들어 주는 아동인권 옹호가의 한사람일 뿐이다. 이게 가장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을 하기 위해 특별한 연구를 했다거나 학위를 받은 일이 없다. 단지 믿음의 가문에서 받은 가정교육에 교회마당을 집 마당처럼 밟으면서 받은 신앙교육,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받은 교육이 나를 행복한 아동인권 옹호가로 만들었다. 학교 졸업 이후엔 훌륭한 일터로 인도돼 그곳에서 강한 훈련을 받았다.
나는 자신을 강하게 훈련하는 편이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들어 사용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나는 준비 없이 무대에 올라가는 것을 제일 두려워한다. 교육환경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나 스스로 훈련하는 것은 자기 선택이고 결정이다. 이런 신념을 갖게 된 건 어떤 글에서 받은 영감 때문이다. 이젠 책 제목조차 떠오르지 않지만,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의 내용을 이해한 대로 옮겨본다.
“조지 워싱턴이 벚나무 밑에서 두툼한 법전을 읽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법률 전문가가 되려나 봅니다’라고 물었다. 워싱턴은 이렇게 답한다. ‘하나님께서 저를 어디에, 어떻게 쓰실는지 모르니 성실히 준비할 따름입니다.’”
이제 이 지면에서 어떻게 아동인권 옹호가가 됐는지 말하려 한다. 내가 인권을 말하는 사람이 되는데 이바지한 3개의 아름다운 동산이 있다. 가정과 교회, 학교다. 다음 편부터는 이들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가 어떻게 배우고 성장했는지를 풀어가고자 한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