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 과학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을 경험했을 때 사람들은 “기적(奇蹟)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크리스천에게 ‘기적’은 절망 속에서 마주하는 하나님의 임재로 여겨진다. 국민일보와 밀알복지재단(이사장 홍정길 목사)은 매달 한 차례 ‘기적을 품은 아이들’(기품아)이란 이름으로 저소득 희귀난치성 장애아동·청소년과 가족들을 만났다. 상상하기 힘든 고난과 아픔이 그득했다. 일상은 ‘가능’ ‘도전’보다는 ‘불가능’ ‘포기’에 맞닿아 있는 듯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의 삶은 기대와 희망을 향해 끊임없이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걸음은 새로운 기적과 꿈을 마주했다.
▒ 일어나 세상으로 걸어라
박주연 (6·미세결실증후군, 뇌병변장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어요. ‘어머 어머머’ 하고 감탄사만 나왔죠. 우리 주연이 다리에 이렇게 힘이 불끈 생기다니요.”
기품아를 통해 ‘엄마할머니’로 알려진 김채경(49)씨의 목소리엔 3개월 전 그날의 감격이 되살아난 듯 떨림이 느껴졌다. 그날은 손녀 주연이가 태어나 처음 걸음을 내디딘 날이다. 2.3㎏의 가냘픈 몸으로 태어난 주연이는 생후 열흘 만에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한 달만 맡아 달라”는 말만 남긴 채 주연이를 훌쩍 떠난 엄마 아빠를 대신해 채경씨는 주연이의 엄마할머니로 살고 있다.
지난 4월 기자와 만났을 때만 해도 주연이의 다리엔 힘이 없었다.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지만 걷기는커녕 스스로 서지도, 먹지도 못해 김씨의 안타까움은 날로 커졌다. 세 살까지 줄곧 병원 신세를 진 주연이의 치료비를 감당하느라 살림은 늘 허덕였다.
‘내 몸 아픈 거 참고서라도 주연이가 치료를 더 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늘 마음으로만 애타게 되뇌던 그때 기품아를 만났다. 재활치료비 지원 덕분에 주연이는 물리 감각통합치료 횟수를 늘릴 수 있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재활센터에서 추가 치료를 받은 지 3개월여 만에 다리에 조금씩 힘이 붙기 시작했다. 김씨는 “치료사와 의료진도 ‘언젠가는 걸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이렇게 빨리 회복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며 박수를 보냈다”고 전했다.
인지능력도 부쩍 좋아졌다. 엄마할머니가 ‘반짝반짝 작은 별’을 불러줄 때 지그시 미소만 짓던 주연이가 곧잘 애교를 부리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김씨는 “따뜻한 마음을 보내주신 후원자들이 만들어 준 기적”이라며 감사를 전했다.
▒ 국가대표로 비상하는 날까지
김도훈 (15·뇌병변장애, 지적장애)
4년 차 보치아(표적구에 가장 가까이 공을 던져 점수를 얻는 장애인 스포츠) 선수 도훈이는 기품아 이후 참가한 굵직굵직한 대회에서 연달아 시상대에 오르는 쾌거를 거뒀다. 지난 5월 전국장애학생체육대회 개인전 동메달과 단체전 은메달, 8월 서울 보치아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선수권대회 금메달, 9월 부산보치아대회 은메달 등 거의 모든 대회에서 메달을 휩쓸었다.
어머니 박영란(40)씨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바우처로 지원되는 치료에만 의존했는데 기품아 이후 도움의 손길이 이어져 치료와 훈련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게 소중한 결과로 이어졌다”고 했다. 박씨는 지금도 훈련 때마다 도훈이의 동료 선수들에게 음료수를 건네며 “함께 기도하자”고 권면한다.
도훈이는 실업팀 입단과 2024년 프랑스 파리 패럴림픽 출전을 목표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내년에 열리는 도쿄올림픽에는 나이 제한 때문에 출전할 수 없지만, 성인이 되는 2024년에는 국가대표로 출전할 수 있다. 지난 3월 “올림픽 갈 거야”라고 당차게 외치던 소년은 온기를 담은 후원을 날개 삼아 비상을 꿈꾸고 있다.
▒ 작지만 한 걸음씩
김지후 (6·뇌병변장애, 시각장애)
지후는 태어날 때부터 두 손과 두 다리를 움직이지 못했다. 설상가상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이 겹쳤다. 혼인신고조차 하지 않은 채 지후를 낳은 엄마는 출산 한 달 만에 집을 떠났다. 그런 지후의 삶을 붙든 건 할머니 이민우(66 서울 신광교회) 집사의 기도였다. 사지경직이 일어날 때마다 손자를 둘러업고 응급실로 내달리는 동안 수도 없이 가슴으로 쏟아낸 기도가 지후를 일으키고 또 일으켰다.
기품아 이후 이어진 도움의 손길은 일상의 작은 기적으로 나타났다. 재활치료비와 생계비 지원 덕분에 옹알이만 하던 지후의 발음이 부쩍 또렷해졌다. 눈을 깜빡이는 게 의사 표현의 전부였지만, 최근엔 팔을 쭉쭉 펴며 할머니를 향한 애정을 표현한다.
이 집사는 “지후의 작은 변화에도 천하를 얻은 것 같고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감도 생겼다. 뭐라 더 감사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따뜻한 마음을 지닌 후원자들이 다른 장애아동들에게도 희망 천사가 돼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는 힘, 기도
“기도가 기적의 시작이었어요.” 기품아를 통해 만난 장애아동 가족들이 입을 모아 전하는 말이다. 발작 무호흡 등으로 생과 사를 넘나드는 응급 상황에도 수술을 앞두고 어디 하나 기댈 곳 없이 아이의 손을 붙든 채 눈 감는 순간에도 그들의 스마트폰에는 옆집에 사는 이웃, 중보기도 모임, 담임목회자 등으로부터 기도 응원이 끊임없이 날아왔다. 문자 창에 적힌 기도가 또 다른 기도를 낳고 그렇게 움튼 용기와 희망이 기적의 씨앗이 된 것이다. 2019년의 끝자락. 지금 이 순간에도 이들은 가슴에 품은 기적을 삶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