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권혜숙] 포옹이 필요한 때

입력 2019-12-26 04:01

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에 이런 퀴즈가 나왔다. ‘누워서 이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 불면증을 치료할 수 있다. 1분 안에 잠들 수 있는 이 자세는 무엇일까?’ 정답은 ‘포옹하는 자세’. 누군가와 끌어안으면 사랑·행복의 호르몬이라 불리는 옥시토신과 세로토닌이 분비돼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안아줄 이 없는 솔로라면 오른손을 왼쪽 겨드랑이에 넣고, 왼손을 오른쪽 어깨에 올려 ‘셀프 포옹’하는 자세를 취하라는 처방전이 덧붙었다.

지난주 국민일보 출판면에 리뷰가 실린 신간 ‘촉각, 그 소외된 감각의 반격’에는 외로움과 불안감을 호소하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미국에서 포옹 서비스 업체들이 성업 중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포옹 전문가(cuddlist)’를 다룬 뉴스위크 기사도 포옹이 최근 10년간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에서 일종의 치료 요법이자 정신 건강 관리의 틈새시장으로 발전해 왔다고 소개했다. 서비스 방식은 이렇다. 직원은 고객과 사전 통화를 거쳐 고객이 원하는 장소로 방문한다. 만나서 포옹하거나 쓰다듬거나,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대화를 한다. 업체 대표는 “포옹은 다른 사람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라며 “터치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 포옹을 하면 생각보다 쉽게 분노가 가라앉고 기분이 나아진다”고 포옹의 치유의 힘에 대해 설파했다.

일상에서 포옹을 꺼리지 않는 미국인들이 시간당 10만원 가까운 비용을 내고 이용할 정도라면, 한국에서 포옹 서비스의 성공 가능성은 어떨까. 가족 간에도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는 것조차 어색하다는 이들이 적잖은데 낯선 이와의 포옹이라, 글쎄. 차라리 ‘촉각, 그 소외된 감각…’에 실린 ‘전신 포옹 기계’가 한국에 더 맞는 방식이지 싶다. 이 기계는 루시 맥레이라는 예술가가 지난 10월 한 전시회에서 선보였다. 여러 개의 작은 쿠션이 샌드위치 모양으로 놓여 있고, 사람이 가운데에 누우면 쿠션이 안마의자처럼 서서히 온몸을 꼭 껴안듯 압박하게 돼 있다. 기계를 체험한 관람객들은 “덩치가 큰 친구가 안아주는 기분” “안락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계에는 큰 단점이 있으니, 다른 사람이 장치에 달린 핸들을 돌려줘야 작동한다는 것이다. 기술력 빼어난 한국 안마의자 업체들이 리모컨 달린 포옹 기계를 생산해낸다면 반응이 뜨겁지 않을까.

하지만 포옹에서 위로와 격려를 얻을 수 있는 건 사람이 주는 안온한 체온 때문이니, 포옹 기계가 그런 친밀감과 유대감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짜 포옹이라도 간절해지는 때가 있는데, 소설가 김중혁의 단편 ‘가짜 팔로 하는 포옹’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거 알아?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대. 나는 그때 네가 날 안아주길 바랐는데, 네 등만 봤다고. 등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고.”

얼마 전 해를 넘기기 전에 얼굴을 보자며 친구가 회사 근처로 찾아왔다. 친구는 만사 어깃장부터 놓는 사춘기 아들 때문에 잔뜩 속이 상한 채 잔업 때문에 출근한 토요일 아침, 가정도 일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는 생각에 텅 빈 사무실에서 마냥 눈물이 났다는 얘기를 했다. 친구에게 “힘들 때 힘내라고 하면 위로가 안 된다고, 펭수가 그럴 땐 사랑한다고 얘기하래. 친구야, 사랑해”라고 했다. 친구는 열없이 웃어보였다. 친구를 그냥 꼭 안아줄 걸 그랬다.

마침 미국에서 포옹 서비스를 찾는 고객이 가장 많아지는 때가 연말이라고 했다. 두 팔을 벌리면 자연스럽게 품을 파고드는 사이, 그렇게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면 연말이 스산하지 않을 것이다. 혹 그런 이들이 없다 해도, 자신에게 셀프 토닥토닥을 해줘도 좋겠다. 여성 듀오 옥상달빛의 노래 ‘수고했어, 오늘도’를 함께 들으면 제격이겠다. 가사를 ‘수고했어, 올해도’로 살짝 바꿔보자. ‘수고했어 올해도/ 아무도 너의 슬픔에 관심 없대도/ 난 늘 응원해, 수고했어 올해도.’

권혜숙 문화부장 hskw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