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신동엽] K매니지먼트 2.0

입력 2019-12-24 04:05

최근 우리 경제를 한때 대표했던 김우중과 구자경 회장이 영면했다.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느낌이다. 영욕이 교차한 지난 100여년의 근현대사에서 우리 사회의 발전에 가장 기여한 것은 단연 기업들이다. 1960년대까지 절대빈곤 상태였던 후발국이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사례는 전무후무하다. 해외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BTS를 비롯한 K팝을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삼성, 현대, LG 등 기업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우리 기업들이 만든 무수한 제품들이 선진국을 포함한 모든 세계인의 일상생활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우리 제품들의 좋은 이미지와 이들이 개척한 해외 시장에 대한 노하우가 없었다면 BTS와 한류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기적적 성과의 비결은 학자들이 ‘K매니지먼트’라고 부르는 독특한 기업경영 모델에 있다. K매니지먼트는 빠른 규모 성장을 추구하는 전략, 엄격한 위계질서에 기반해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는 조직 그리고 밤낮없이 헌신적으로 일하는 근면성 문화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시점에서는 전근대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K매니지먼트가 형성된 1960년대 시대환경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최고의 선택이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산업 공백’ 상태였다. 산업사회로의 전환기인 19세기 말 우리는 자생적 근대화가 일제의 침략으로 좌절되었고, 오랜 식민지배로 경제가 피폐해졌으며, 한국전쟁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근대 경제의 씨앗마저 완전히 파괴되어 현대적 산업사회의 기반이 전무했었다.

이때 등장한 리더들이 바로 이병철, 구인회, 정주영, 박태준 등 불세출의 기업가들이다. 이들은 대부분의 후발국이 선진국과의 경쟁을 포기하고 종속적 경제를 선택한 것과 달리, 최대한 빨리 선진국들을 따라잡겠다는 ‘빠른 추격자’ 비전을 선택하고 기업경영의 모든 것을 여기에 맞췄다. 빠른 추격자 관점에서 보면 K매니지먼트가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 알 수 있다. 산업 공백 상태에서 서둘러 탈출하기 위해서는 신속한 규모 성장 전략에 주력해야 했고, 선진국들을 최대한 빨리 따라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만 했으며, 농민적 근면성은 필수였다. K매니지먼트에 기반해 우리 기업들은 한강의 기적을 연출해낸 것이다. 최근 별세한 구자경과 김우중은 이건희, 정몽구 등과 함께 K매니지먼트에 글로벌화와 정보화를 가미해 버전 1.5로 개선시킨 세대였다. 이들은 1990년대부터 급속하게 진행된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환경변화에 신속히 대응해 우리 경제가 글로벌 경쟁력을 가지도록 만든 출중한 기업가들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 경제가 또 다른 위기를 당면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중심으로 한 혁신기반 경제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글로벌 경제의 게임의 규칙 자체가 완전히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자신이 강점을 가진 분야에 대한 선택과 집중으로 기존 경쟁우위를 방어하고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하던 과거와 달리 사업이나 기술 간 경계를 넘나드는 융복합화를 통해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경쟁우위를 끊임없이 남보다 먼저 만들어내는 무경계 상시 창조적 혁신이 새로운 게임의 규칙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기업들의 기존 경쟁력 원천이었던 K매니지먼트가 새로운 환경에서는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K매니지먼트의 강점인 빨리 따라잡고 효율적으로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경영은 상시 창조적 혁신을 통해 존재하지 않던 경쟁우위를 계속해서 남보다 먼저 만들어내는 데는 치명적 장애물이 된다. 이제 기존 K매니지먼트를 개선하는 버전 1.5로는 부족하며, 새로운 환경의 요구에 따라 경영모델을 근본 재설계하는 K매니지먼트 2.0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수적이다. 대부분의 우리 기업들은 여전히 기존 K매니지먼트를 보완하는 개선에 주력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진단했듯이 우리 경제는 지금 패러다임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기업가정신에 충만한 리더들의 영웅적 도전이 시급히 필요한 때다. 구자경과 김우중 회장의 별세가 유난히 안타까운 이유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