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숙 (1) ‘아동이 행복한 세상 만들기’… 거룩한 소명에 순종

입력 2019-12-24 00:06
김인숙 국제아동인권센터 기획이사가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의 본부에서 40여년간 아동인권을 위해 걸어온 날들을 설명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2019년 11월 20일, 유엔아동권리협약(UNCRC)이 유엔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지 꼭 30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지금부터 30년 6개월 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처음 접했다. 이 협약은 마치 하늘이 내린 사명인 것처럼 내게 다가왔다. 하나의 숙제이자 동시에 행운처럼 말이다.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기 6개월 전에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접한 건 내가 국제비영리민간단체 세이브더칠드런에 속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은 세이브더칠드런은 100여개국에서 아동 권리 증진을 위해 일하는 기관이다. 해마다 연맹총회를 개최하고 아동 복지증진과 인권옹호 방향을 설정하며 전략적 대응을 모색한다. 1989년 세이브더칠드런 연맹총회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렸다. 그해 총회가 특별했던 건 총회에 앞서 아동권리증진을 위한 별도의 국제 콘퍼런스가 열렸기 때문이다. 참석자 중 한국인은 내가 유일했다.

콘퍼런스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이틀간 진행됐는데 6개월 후 유엔에서 채택할 유엔아동권리협약도 이때 소개됐다. 협약이 ‘미사여구가 아닌 실현돼야 할 국제적인 약속’임도 이때 강조됐다. 당시 경이로웠던 건 그곳에서 만난 아동들이다. 아동권리 실현 관련 국제회의에 참석한 건 전 세계에서 모여든 성인 아동전문가만이 아니었다. 아동 스스로 자기 생각을 춤 노래 언어로 표현하는 다양한 퍼포먼스가 이어졌는데, 지금껏 익숙하게 봐온 모습이 아니었다. 이들은 콘퍼런스 주최 측이 키워드로 제시한 ‘자유’와 ‘존엄’이라는 인권의 가치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충격이었다. 머리카락 색이나 피부색 등 보이는 것뿐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고 어른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에 거리낌 없는 모습이 우리네와 많이 달라 경이롭기만 했다. 이틀간의 콘퍼런스에 이어 열린 연맹총회 역시 주제는 아동 인권 실현이었다. 모두 ‘아동의 권리는 반드시 실현되도록 일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 천명하고 동의했다.

스톡홀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 일은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여기까지 이끄신 분의 임재를 느끼며, 그분이 내게 내려준 사명임을 직감했다. ‘내가 너를 고아처럼 홀로 두지 않겠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귀국했다.

어느새 30년이 지나 올해 11월 20일, 유엔아동권리협약 채택 30주년을 기념하는 포럼에 참석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처음 알게 해 준 세이브더칠드런과 현재 몸담고 일하는 국제아동인권센터, 두 기관이 함께 준비한 포럼이다. 포럼에선 유엔아동권리협약의 30년을 이야기하고 전망을 논하며, ‘아동폭력 없는 한반도 만들기’란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분명 세상을 바꿨고 아동 신분에도 변화를 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다 함께 아동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엔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갈 길이 멀다는 사실 앞에 새로운 다짐을 한 시간이었다.

포럼 이후 나는 예기치 못한 요청을 받았다.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기고 요청이다. 올해가 유엔아동권리협약 30주년이고, 이를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알린 주인공의 역할을 녹여내 보자는 제안에 당황했다. 도전하겠다는 답을 보내기까지 닷새가 걸렸다. 다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사명이 진행형이기에 도전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분이 사명 실천의 기회를 주셨음을 믿고 다만 순종할 따름이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약력=1942년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 이화여대 불어불문학 학사·영어교육학 석사,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 사회사업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수서종합사회복지관장, 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 부회장, 서울시 어린이·청소년 인권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대통령 표창(2002),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포장(2012)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