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한 공연기획사의 웹진에 콘서트 리뷰를 쓰는 객원기자를 잠시 했었다. 보수를 받는 일은 아니었지만, 대중가수의 콘서트를 공짜로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기에 한동안 꽤 열심히 활동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국내외 뮤직 페스티벌에도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웹진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음악평론을 하는 사람이 내게 물었다. “음악 좋아하세요?”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말문이 막혔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가 겁이 났다. “아, 저는 음악을 잘 몰라요.” 대답은 엉뚱하게 나갔다. 그는 친절하게 웃으며, 잘 안다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르고 잘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었지만 나는 왠지 부끄러웠다.
오랫동안 책등만 보면서 제목과 작가 이름만 알고 있는, 책장에 꽂힌 읽지 않은 책처럼, 나는 음악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면, 장르에 대한 이해와 각 장르의 대표적인 가수와 그 가수의 주요 곡을 줄줄이 읊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하고 그때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음악보다 공연장과 페스티벌을 좋아한다는 것. 나는 음악이 담아내는, 음악을 품은 분위기가 좋았다. 그럼 공연장을 찾기 전에는 어땠지? 중고등학생 시절, 내게 음악은 마음을 대신 표현해주는 노랫말이 전부였던 것 같다. 이를테면 입대를 앞둔 짝사랑 성당 선생님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었던 리처드 막스의 ‘Right here waiting’의 가사 “Wherever you go/Whatever you do/I will be right here waiting for you” 같은(이 노랫말의 발견은 중3 최고의 수확이었다). 나는 음악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혹은 음악이 전하는 이야기를 좋아했던 것이다.
음악과 문학이 맞닿아 있는 지점,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바로 거기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많은 이가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음악이 녹아 있는 소설의 매력을 아는 사람들 말이다. 요즘에는 작가들이 한 작품을 쓰는 동안 함께했던 음악의 플레이 리스트를 공개하는 일도, 독자들이 그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의 플레이 리스트를 찾아 듣는 일도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선물 같은 책이 찾아왔다. 백민석의 독특한 형식의 소설 ‘버스킹!’이다. 음악에서 탄생한 열여섯 편의 짧은 소설이 실려 있고, 각각의 소설에는 그 음악이 담긴 앨범과 뮤지션에 대한 작가의 짧은 에세이가 더해졌다. 하나의 음악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짧은 소설도 인상적이고, 소설과 에세이의 결합이라는 점도 독특하다. 마치 음악을 듣고 나면 DJ가 그 음악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 것 같다. 생각해보지 못한 형식의 책인데, 꼭 오랫동안 기다려온 책처럼 느껴진다.
첫 번째 소설 ‘영감의 사막에서 음악이 들려온다’는 작가가 펼치는 ‘버스킹!’으로의 초대이자 백민석 작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읽힌다. 작가에게 소설은 세속적인 것들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황폐한 사막이 된 소설적 영감의 세계에서는 거친 바람이 불어와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이때 작가의 손에 잡히는 것은 ‘커브드 에어 라이브’ 앨범. 그리고 마침내 “영감의 사막에서 음악이 들려”온다. 이후 이어지는 각각의 짧은 소설은 바로 이 영감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가족들과 소통이 어려워지는 가장이 지미 헨드릭스의 ‘머신 건’을 들으며 사랑하는 가족들을 쏴 죽이는 환상을 즐기고(‘머신 건’), “불행에 낯빛이 찌들고 불안에 두 뺨이 푸들거리며 불만에 입이 삐죽 나”온 군자들의 우주 끝에 무엇이 있는지 1973년 스페이스 록 밴드 호크윈드의 ‘스페이스 리추얼’ 앨범에서 응답을 듣는 이야기(‘우주의 경계 너머’) 등은 백민석 특유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 위에 음악적 체험의 순간을 펼쳐놓는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경험한 버스킹의 결과로 쓰인 이 책은 “나쁜 미래”의 곳곳에서 작가 백민석이 보여주는 열여섯 군데의 버스킹 현장처럼 다가왔다. 동시에, 작가가 직접 찍은 버스커들의 사진은 자연스럽게 소설로 읽히기도 했다. 소설을 버스킹으로 보여주고, 버스킹을 소설로 읽히게 하다니. 과연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