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으로 떠난 비건… 침묵으로 답한 북한

입력 2019-12-18 04:03
스티븐 비건(오른쪽 두 번째)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17일 이도훈(왼쪽 두 번째)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함께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2박3일간의 방한 일정을 마친 비건 대표는 일본으로 떠났다. 연합뉴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17일 빈손으로 한국을 떠났다. 전날 비건 대표가 공개적으로 만남을 요청했음에도 북한이 응하지 않으면서 북·미 접촉이 성사되지 못한 것이다. 북한이 대미 협상 시한으로 정한 연말이 10여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협상 재개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한반도 비핵화 시계가 2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연말이 지나면 ‘새로운 길’을 걷겠다고 공언한 북한을 향해 “무언가 진행 중이면 나는 실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2박3일간의 방한 일정을 마친 비건 대표는 이날 오후 김포국제공항에서 ‘회동 제안에 북한이 왜 응답하지 않은 것 같으냐’ ‘북한으로부터 받은 메시지가 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은 채 일본으로 떠났다. 비건 대표는 전날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지금 한국에 있고, 당신들은 우리를 어떻게 접촉해야 할지 알고 있다”며 판문점에서 북측과 만나고 싶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비건 대표는 17일 오전에는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고 관계 기관을 방문했으며, 켄트 해슈테트 스웨덴 외교부 한반도 특사와 오찬을 함께했다. 일본으로 떠난 비건 대표는 다키자키 시게키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 등을 만날 예정이다.

조선중앙통신은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8주기를 맞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등과 함께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는 소식을 전했을 뿐 별도의 대미 메시지는 내놓지 않았다. 최근 들어 미국의 대북 관련 메시지가 나올 때마다 북한이 즉각 담화를 내서 대응해온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북한이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뜻을 이번에 확실하게 미국에 전달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비건 대표가 일본에 머무르는 19일까지도 북·미 접촉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북한이 더 이상 미국과 협상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북한이 미국의 대화 요청에 응하지 않은 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재개 움직임 등으로 ‘레드라인’을 넘을 조짐을 보이자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경고 메시지를 다시 내놨다. 트럼프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주지사들과 라운드테이블 행사를 갖던 중 북한 상황에 대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 “우리는 그것(북한)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북한에서) 만약 무언가가 진행 중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북한을 매우 자세히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많은 곳’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미국이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미사일 시험장을 포함해 다른 위험 지역도 모니터링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최근 북한은 동창리 미사일 시험장에서 ‘중대한 시험’을 두 차례 진행했다고 발표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이날 간담회에서 북·미 협상 시도가 끝내 결렬될 경우 북한이 핵보유국 인정을 염두에 두고 고강도 도발에 나설 것으로 전망했다. 신 센터장은 “북한은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미국이 양보하지 않으면 북한이 힘으로 보여줄 테고 어느 때보다 강도 높은 도발이 나타날 것”이라며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는 북한의 시도를 한국이 용인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손재호 기자,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