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기, 기록의 전문가”… 이번에도 발목 잡은 업무수첩

입력 2019-12-18 04:06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회의실에서 2017년 10월 12일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대법원과 법원행정처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이 공개되고 있다. 뉴시스

청와대의 하명 수사 및 선거개입 의혹 사건을 살피는 검찰에 도움을 준 것은 송철호 현 울산시장의 참모였던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의 기록 습관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송 부시장의 업무수첩에 지난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송 시장 선거캠프의 움직임, 청와대 측의 조력 정황이 고스란히 담겼다는 얘기다.

송 부시장을 잘 아는 한 울산 지역의 인사는 17일 “송 부시장은 ‘기록의 전문가’라 불릴 정도였다. 수첩에서 모든 게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2부(부장검사 김태은)가 지난 6일 송 부시장 집무실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업무수첩은 한 면(面)이 A5용지 크기이며 상당한 분량인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수사팀은 이 업무수첩의 양면을 펼쳐 A4용지에 복사, 사본을 수사에 활용하고 있다.

핵심 참모의 꼼꼼한 기록은 앞선 대형 수사 과정에서도 고비마다 진실 발견에 도움을 줬다.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위법적 지시 사실을 드러나게 한 것은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이 검찰에 제출한 56권의 수첩이었다. 방대한 양부터가 화제였다. 안 전 수석은 검찰에 수첩 여러 권을 임의제출한 이후에도 조사 중 보좌관에게 연락해 따로 보관하던 수첩들을 추가로 가져오라고 했다.

안 전 수석이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쓴 내용, 박 전 대통령과 외부 인사들의 면담 내용이 기록된 이 자료는 ‘안종범 수첩’이라 불렸다. 사건 관계인들은 이 수첩의 증거능력을 부정했다. 하지만 지난 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국정농단 사건들의 상고심 선고 때 박 전 대통령의 지시와 관련한 수첩의 증거능력을 일부 인정했다.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썼다는 ‘비망록’도 검찰과 특검의 국정농단 수사, 헌법재판소의 박 전 대통령 탄핵심판 과정에서 비중 있는 자료로 쓰였다. 김 전 수석이 청와대에서 근무한 2014년부터 2015년까지의 회의 내용이 적힌 이 자료에는 청와대가 문화예술계를 탄압한 사실 등이 담겼다. 특히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지시를 ‘장(長)’ 표기와 함께 적어둔 것이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국정농단 사태에 ‘장’이 있었다면 ‘사법농단’ 사건 당시에는 ‘대(大)’자가 기록된 수첩이 주목받았다. 검찰이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해 확보한 업무수첩 3권에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지시를 시사하는 ‘대’자가 표기된 내용들이 발견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구속전 피의자심문에서 수첩의 조작 가능성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검찰은 “수첩 제O권 제O면을 보여주며 문답한다”는 식으로 조서를 썼고, 문답 말미에 수첩 사본을 편철했다.

송 부시장의 업무수첩은 청와대의 선거개입 부인 속에 중요 증거가 될 전망이다. 향후 공판에서도 증거능력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은 “검찰이 업무수첩을 복사해둔 것이 굉장히 두툼했다”며 “여러 군데에서 BH(청와대)와 관련된 부분을 봤다”고 말했다.

허경구 구승은 기자 nine@kmib.co.kr